몸가짐을 바로해서 총선평가와 전망을 얘기하는 기회는 이래저래 있어야겠지만, 내게 17대 총선은 유난히 '아는 사람들'이 많이 당선되어 감상적 소회가 깊다. '그 나이되도록 남들 다하는 국회의원 한번 못하면서 무어 그리 바쁜지' 하는 질책과 원망섞인 부모, 친척의 눈초리를 애써 피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을지라도 그렇다. 3번만 거치면 다 아는 사람이라는 우리나라에서 '뭐 특기할만한 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래저래 25년 넘게 운동판 언저리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알게된 사람들이다 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전대협 1, 2, 3기 의장이 다 당선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선도적인 문제제기로 학생운동이 주요한 역할을 한 적이 있었고, 그들이 핵심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학생운동 당시 간난(艱難)과 고초를 겪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소위 운동가 - 요사이는 터부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 칭호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삶의 이력으로 보아 '과연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를 몸으로 느끼고 있을까'하는 회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이 386이란 수식어로 치장되어 제도정치에 진입하는 이력이 되고 보수정치를 연장하는 '젊은 피'의 역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노동자·민중운동진영의 세력이 미약하여 우회로를 선택했다든지 정치적 신념으로 '비판적 지지'를 했다 강변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운동이 진전하고 적어도 이번 선거에서 노동자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기치를 걸고 기어이 원내에 진입한 민주노동당에 대해, 선거 막판에 유시민이 보인 태도를 보아 그들 사고의 대강을 읽을 수 있다. 하여 굳이 따진다면 원내에서 귀감을 보였다 할지라도 전국연합 의장출신으로는 이창복 의장보다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함께 한 천영세 의장에게 더 동지애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장에 가겠다고 학교 때려치우고 용접을 배워 한참 자리를 잡아갈 즈음 '충격적인' 구로동맹파업이 있었다. 당시에 몇몇 같이 생활하던 선배, 동지들과 논쟁을 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전체 대중운동과 유리된 정치적 선도투 아닌가' 또는 그렇다 할지라도 '대중운동 진전의 표현이자 대중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등... 보다 공공연하고 대중적인 운동에 스스로 몸을 싣기로 한 마음먹은 것도 그 이후이다.
그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이 국회로 갔다. 이후 지금은 이래저래 떠난 사노맹으로 정리한 동지들이나 유시민도 있지만, 핵심이랄 수 있는 김문수, 심상정 그리고 진원지이자 핵심노조였던 대우어패럴 김준용위원장의 매부되는 배일도 등 - 서노협의장으로 전노협 건설의 핵심이었던 배일도 지하철위원장과 김준용은 항상 행보를 같이 해왔고 국회진입을 몇차례 시도하던 김준용은 최근까지 지하철 배일도 집행부의 지도위원으로 있었다 -. 구로동맹파업의 정신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그리고 전노협, 민주노총의 총파업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역할은 다했다. 민중당 노동위원회에서 함께 하기도 했던 김문수는 일찍이 전향(!)을 했고 - 최소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포기했기에 그리고... - 배일도는 김문수를 따랐다. 심상정은 전노협, 민주노총을 거치면서 노동자 대중운동의 진전에 온 몸을 던져 구로동맹파업이 단지 선도투만이 아니었음을 보이고자 했다. 그리고 그도 갔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건설된 서울노동운동연합이 제기한 '정치적 노동운동'에 경제주의자로 낙인찍혀 스스로 피해자라던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방용석도 민주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서 김문수와 만났다. 이후 노동부장관을 거쳐 지금은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으로 있는 그는 여러 눈에 띄는 족적을 남겼다. 김대중정부 막바지에 노동부장관으로서 '주5일 정부법안, 경제특구법, 공무원조합법' 등 민주노총이 규정한 '반노동자적 3대 쓰레기악법' 제정에 한 몫한 그가,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분노를 보이던 '정치주의자' 김문수를 국회에서 만났을 때 어떠했을까? 70년대 말 원풍모방 탈춤반을 드나들면서 만났고 한두 차례 일도 같이했던 그는 몇 년 전 우연히 마주치자 "요사이 혁명 잘 되나?"라는 비아냥으로 나를 반겼다. 방용석 그가 비아냥거리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 80년대 경제주의(?)는, 같은 원풍모방 지부장이었고 지금도 투쟁현장 앞에서 싸우다 경찰차에 받혀 병원에 입원했다 최근 퇴원한 박순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의장으로, 이번에 민주노동당으로 등원한 YH 최순영위원장으로 아직도 퍼렇게 살아있다.
나는 단병호위원장을 좋아한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는 콘크리트를 버무리기 위해 신은 장화로, 수배중에 우리 집에 들러 갈아입고 벗어둔-다시 올거라 믿어 세탁해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속옷으로, 그리고 징역 면회소의 쇠창살로 기억한다. 이제 그 단병호의 가슴에도 금뱃지가 새겨졌다.
그는 누구나 알다시피 해방 아니 분단 이후 최초, 최대의 노동자 대중운동을 세워낸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가 일어선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자본으로서도 최대의 위기였고, 그 이후 자본은 스스로 축적전략을 달리해야만 했다.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대중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전략이 대중의 삶을 강제했다. 그리하여 노동현장의 구호가 그가 운동을 시작했던 87년과 다르지 않은 지금, 지금 등원한 단병호는 원망스럽다. 과연 마지막 징역을 나오면서 우려하던 민주노동당의 그 많은 문제들은 해소된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져버려야 할 정도로 캄캄한 노동운동의 전망을 민주노동당으로 열어낼 수 있을 것인지, 이제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동시에 운동의 굴레로 작동하지는 않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하고 있는지, 그 보다 더 급한 과제는 없었는지... 많은 물음을 단병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한 때 나와 함께 운동을 했던 딸래미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한다고 집을 나가자, 나를 찾아와 걱정하던 부성애로 먼저 기억하는 그 권영길 위원장에 대해 공개, 비공개적으로 비판해야 했던 가슴아픈 역사가 단병호 위원장에게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것을...
단위원장이 민주노동당에서 함께하자는 충심어린 제안에 가슴이 아프다. 당, 합법정당을 하지말아야 한다고 닫아둔 적도 없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 함께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생디칼리스트 또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라는 적개심 어린 소리를 당분간 더 들어야 할 것 같다. 운동의 지형이 바뀔 것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나, 제도언론까지도 얘기한다.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든, 의제적인 노사정합의를 배경으로 하는 민중주의적 정치에, 의회주의적 정당에 종속된 노동조합에 갇힌 노동운동, 노동자 정치운동의 역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기에... 특히 지구적인 수준에서의 자본의 긴장이 강화되고 더구나 무장한 세계화로 옥죄어 오는 지금.
열사정국으로 다가왔던 그 참담함이 총선을 거치면서 나, 개인에게는 운동의 새로운 전환기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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