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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19일의 부안민란, 그리고 경찰계엄이라는 국가폭력의 대응. 그러자 진보적인 사회운동 단체들이 대거 부안 연대를 표명했고 부안의 투쟁 현장을 찾았다. 그래봤자 대규모집회 때 그 활동가들의 참여 숫자는 5백명에서 1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작년 가을 핵폐기장 문제로 똑같은 사안이 발생했던 이탈리아의 한 소도시에서는 주민 저항 2주만에 10만 명의 대중들이 참여함으로써 단박에 끝장내버린 것과는 대조된다. 물론 이탈리아 한 소도시 주민들의 투쟁에 비하여 부안 주민들의 반핵투쟁은 '세계적인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느새 운동권에서도 '부안에서 배우자'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부안에서 뭘, 어떻게 배우겠다는 것인지 도통 소식이 없다. 혹시 아직도 뭔가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안의 반핵대책위에서는 별로 배울 게 없으니 주민들에게 배우라고 충고하고 싶다.
부안의 현 상황은 군수퇴진 요구 1인시위 정도 외 소강 상태다. 정부가 위도 핵폐기장 백지화같은 것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인 주민투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2·14 자체 주민투표에서 압승함에 따라 많은 수의 주민들 스스로가 핵폐기장 싸움은 이제 다 끝났다고들 생각한다. 그리고 다들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군대책위의 집행부 활동도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상태이며, 면대책위들도 지역발전협의회 형태로 전환된 경우도 있으나 대개 대책없이 해체되다시피 했다. 뜨거웠던 주민투표 투쟁의 승리는 현재에 있어서 투쟁의 해체효과를 낳았다. 군대책위의 핵심부들도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대책위에서조차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잘못된 정세 인식력이다.
사실 주민들의 투쟁력이 대안없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는 데에는 대책위의 책임이 크다. 자체적인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면서도 주민투표 이후에 대해 아무런 방안도 없었고 주민투표가 끝난 뒤에도 대안을 마련하지 못해 주민들을 혼란스럽게 해왔다. 그러다보니 정신차려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부안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총선투쟁을 주장했다.
부안에서 총선투쟁으로서 가장 의미있는 이슈는 주민독자후보론이었다. 총선을 핵폐기장 투쟁의 일환으로 보려고 한 많은 사람들은 주민독자후보를 주장하였다. 주민독자후보란 정치인 및 정치적 활동가와 대책위 관계자를 제외하고 핵폐기장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자 순수한 주민을 말한다. 나는 몇몇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주민독자후보를 내자고 대책위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주장하였다. 나는 총선투쟁을 반핵정치투쟁으로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의미화했다.
"우선 지난 2·14 주민투표를 통해 대두된 '자치민주주의'의 두 번째 실험이 된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의 과정이지만 주민독자후보를 내게되면 그것은 더 이상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치민주주의로서 성격을 갖는다. 더구나 주민독자후보운동은 정치혁명이 되며 노무현-열린우리당이 떠드는 이른바 '정치개혁/시민혁명'을 무색케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히 주민혁명을 한다! 이것이 바로 부안의 혁명이다.
주민투표에 이은 한국 민주주의 새로운 실험장이 될 수 있다. 주민독자후보운동이 정치혁명이 된다는 것은 총선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전복시킨다는 것에서 일단 찾아볼 수 있다.... 주민독자후보가 총선에 출마한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출마가 아니라 철저하게 주민으로서 출마하며, 따라서 정치판으로서의 총선투쟁이 아니라, 주민들에 의한 주민들을 위한 주민들의 총선 난장판 축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혁명으로서의 전복행위는 문화행위로서의 민중 카니발이 된다. 정치 전복행위이자 문화 카니발로서의 주민독자후보운동은 엄청난 활력과 쾌감을 주민 스스로에게 불어넣을 수 있으며, 정치-사회적으로는 커다란 압박이 된다...
<사심을 버리고 결단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야말로 우리가 펼쳐왔던 <생명의 존엄성>과 <부안의 존재성>을 다시 한번 드높일 수 있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약간의 분란과 분열을 감수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하는 게 반핵 민주 투쟁하는 사람들의 정도다. 약간의 분열이 생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잊혀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주민독자후보론은 망상에 그쳐지고 말았다. 주민독자후보론은 반핵민주투쟁의 의미를 새롭게 생성시켜낼 수 있는 문화정치적 사건이 될 수 있었지만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그것은 첫째로, 반핵민주투쟁을 장악해온 대책위의 다른 생각 혹은 '정치적 침묵' 때문으로 판단된다. 주민독자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책위의 결정을 고대했다. 그러나 대책위의 핵심부는 이런저런 계산으로 주민독자후보에 대해서는커녕 총선투쟁이란 개념조차 가지려하지 않았다.
2·14 주민투표로 핵폐기장 싸움은 끝장났다고 판단하는 그들의 자연스런 정세 인식력일 수 있겠다. 그러나 설령 핵폐기장이 완전 백지화되었다고 해서 주민들의 투쟁의미조차 백지화시켜서는 곤란할 일이다. 반핵민주투쟁의 성과와 의미를 생활정치의 장으로 거듭나게 해야 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투쟁의 실천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부안의 투쟁은 진행중이며, 제2의 투쟁으로 연속되어야 하는 바, 대책위 핵심부는 사실상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주민 마음의 정치를 담지해내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주민 위에 군림하는 행보를 해왔다. 그러므로 대책위가 총선에 대해 침묵을 해온 것은 다름아닌 정치적 침묵이다. 3월 내내 대책위의 누가 총선에 나간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떠돌았고 그 때문에 주민들이 마음고생이 심하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심지어는 (핵폐기장 문제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책위의 누구든 총선에 출마하면 찬핵으로 돌아서버리겠다고 하는 말이 나와도 대책위는 총선에 대한 아무런 입장도 공론화하거나 발표하지 않고 내내 꿀먹은 벙어리 행세를 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환장하게 했다.
이는 분명 대책위의 직무유기이며, 주민들의 고통과 혼란과 의구심을 증폭시켜줬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민독자후보는 둘째 치고라도 주민들의 의구심만큼은 곧바로 해소해줘야 했던 것 아닌가. 그리고 대책위가 주민독자후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것은 서로 다른 후보의 지지로 주민들의 분열을 우려해서라는 것이 지배적인 이유였는데,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였다.
결국 대책위는 선거운동기간에 들어선 4월초에야 핵폐기장 찬성 후보에 대해 낙선운동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그마저도 명시적이지 않은데다 실천적이지도 못하고 있다. 주민독자후보론이 좌초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직적 기반으로 주체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책위가 주민후보를 내지 못하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도 추진했어야 하는데 실천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좀더 근원적으로는 주민들에게 내재된, 정치적 전복의 상상력 부재로 말미암아 주민독자후보론이 좌절됐다고 본다. 총선이라고 하는 것은 국회의원을 뽑아주는 것이고 정치는 그렇게 해서 선출된 정치인이 하는 것이지 주민들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과 정치판에 대해 불신이 크다 해도 소위 국회의원감이라면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는 식의 부르주아적 민담들이 지배적이며, 그것을 벗어난 상상 즉 가령 핵폐기장 투쟁에서 유명인사로 부상한 어떤 할머니가 후보로 나서서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은 주민들 스스로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발상에 대해서 오히려 무슨 장난하는 것이냐고 빈축사기도 한다. 이는 철저하게 주권자를 객체화시킨 근대정치의 소산이자 과정인 대의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훈육되어진 무의식일 터이다.
주민독자후보는 총선에서 주민대표자를 내세우는 것이긴 해도 대의민주주의에 반발하는 직접민주주의 혹은 부안의 새로운 창안물로 실험될 자치민주주의의 중요한 지표일 수 있었다. 주권자 즉 주민의 직접정치로서의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 이것의 문제는 부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관련된다.(인터넷 참여를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길이 열리고 있다고들 하는데, 환경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가는 의문스럽다.)
반핵민주투쟁의 장정(長征)이 생산한 성과와 의미는 크다 할지라도 주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전복의 상상력으로 이어지게 하는 데까지는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런 한계가 차후 주민자치기구 활동들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주민들에 내재된 정치적 전복의 상상력 부재는 핵폐기장 투쟁을 총선투쟁으로 이어지게 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부안 주민들에게는 핵폐기장 투쟁이라는 민심의 감정구조와 총선이라는 정치적 감정구조가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총선이라는 정치행사는 주민들 사이에도 핵폐기장 투쟁과는 다른 결로 인식되어지고 있어 핵폐기장 투쟁의 정서로만 밀어붙이기에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복잡성을 띠었다.
특히 주민투표 이후 핵폐기장 싸움은 다 끝난 걸로 생각하는 주민들도 많이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부안 주민들은 선거를 며칠 앞둔 오늘 환장할 지경에 이르고 있다. 열린우리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커보이고 있고,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을 밀기 위해서 반감이 큰 후보를 찍을 수도 없는 반응들인 듯 하다.
부안군은 고창군과 한 지역구로, 열린우리당 김춘진 후보는 부안 사람이고 민주당 정균환 후보는 고창 사람이며, 두 군의 인구수는 비슷하다. 또한 핵폐기장 싸움에는 함께 동참해왔지만 역시 반감이 큰 무소속 후보를 밀기에도 망설여지는 듯 하다. 민주노동당 후보는 없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선호하지 않는 주민들은 대안적 후보가 없는 공황적 상태에서 골 때려질 수 있는 총선 결과에 대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열린우리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패배감이나 쪽팔림이 팽배할 것 같다. '다른 선거'가 가능할 수 있었던 부안, 그러나 그것이 좌절된 부안은 지금 '총선공황'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시안은 "독자후보 못낸 게 천추의 한"이라는 한 주민의 발언을 제목으로 뽑아 기사를 올렸다. 정당투표에서 반핵민주투쟁을 통해 인지도가 상당히 높아진 민주노동당 표라도 많이 나온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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