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권 위임이 당연한 것인지부터 이야기해보자.
루소는 참으로 훌륭한 말을 남긴 것 같다.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 꼭같은 이유에서 주권은 양도될 수도 없다....인민의 대리자는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고 또 될 수도 없다. 그들은 단순히 인민의 대리행위자이며, 어느 것도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인민이 몸소 승인하지 않은 어떤 법률도 무효이다. 영국인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지만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의회구성원의 선거시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구성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화된다. 그들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라고...
모 방송 시사프로그램을 보면서, 위 인용구가 적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민중의 삶이 고스란히 베어있다고 하는 전통적 시장으로 지지를 호소하러 후보자들은 달려간다. 그리고 민중의 어려운 삶을 몸소 체험한답시고, 그들과 악수하며 짧은 얘기들을 정신없이 나누며 지나간다.
그 시끄러운 10분의 혼란은 그들이 사라진 이후 10분 뒤에는 그들이 왔다 간 흔적조차 없이 시장골목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시장사람들은 그렇게 느낀다고 한다. 또 "때가 되었구나" 라고...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투표는 주권행사라며 아주 위대한 가치로 의미부여 받으면서....
직설적으로 말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지는 주권을 위임해도 그 대표자가 부르주아지의 이익과 위배된 행위를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일개의 시민으로서 주권을 위임했을 때, 권력을 위임하는 시민의 이해와 대표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적합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위임은 스스로 지배를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을 위임한 적은 없다. 자유주의 국가이론의 전제일 뿐이다. 국가가 공동체의 이익을 실현하는 실체로 우리는 오랫동안 교육받고 전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그로 인해 사회적 적대가 경제적 영역에서 가시화되면서, 그리고 더 많은 문화적, 사회적 영역의 적대가 가시화되면서, 국가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전제들은 현실적으로 깨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는 특정한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 피지배층, 소수자들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권력을 위임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독재와 민주주의'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대립적인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투쟁은 현 체제를 민주화시키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성격과 결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립구도가 좌파 내에서도 동의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누구인가를 묻는다. 이러한 논의를 계급환원론적 경제주의적 해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생산자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배받는 사회적 약자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자본의 직접적 착취뿐만 아니라 지배를 유지해왔던 모든 사회적 억압기제에 대한 저항적 주체이자 상징적 의미로서 프롤레타리아를 설정할 수 있다고 본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억압받는 소외되어온 사회적 약자의 권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잘못된 대립구도를 극복하고 주체와 내용으로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민주주의 투쟁은 지배적인 자본 논리를 뛰어넘는 체제의 경계 선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투쟁의 성격을 갖는다. 비정규직 투쟁도 그렇고, 이주 노동자 투쟁도 그렇고, 이라크 파병반대 투쟁도 그렇고, 부안 투쟁도 그렇다.
그렇다면 직접민주주의의 조건과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대의제냐 직접이냐는 어떤 사회적 조건이냐에 따라 다르다. 대의제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은 기존 체제의 정당성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일당이 되면,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그만큼 직접 민주주의 요소인 국민소환제는 그 자체로서 그렇게 위력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근간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이다. 자본주의적 시장논리의 관철이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일반적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생산수단의 공동체적 소유와 공동체적 소유로 준하는 다양한 형태의 소유형태를 전제하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전통이 급진적 민주주의와 좌파적 전통에서 논의되는 것은 이러한 논의가 통치방식의 법제도적 측면만을 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산을 어떻게 공동체적으로 가능하게 할까, 삶은 어떻게 조직하는 것이 연대와 공존의 논리로 존재하는 것일까,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인 삶의 구분과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삶의 조건과 전망을 자신 스스로 선택하고 집행할 수 있는 자율성의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 직접민주주의이다. 이러한 진정한 자유로운 주체들이 일반화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역전시켜야 한다. 부안의 경험이 그 힘겨운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보다는 지방이, 자본의 논리보다는 연대의 논리가, 반환경적인 논리보다는 친환경적인 논리가 더 우세한 권력으로 되기까지 피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래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진정으로 공동체의 문제점을 토론하고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의 장을 마련하였으며, 그러한 정치적 삶을 통하여 그 공동체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변형시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현 단계 비정규직 투쟁, 이라크파병 반대투쟁, 이주노동자 투쟁 등이 모두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 있거나 그 체제를 정당화해 주는 투쟁들이 아니라 대안권력과 대안주체, 대안사회를 형성하는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쟁들은 자본주의적 시장논리를 극복하여 생존과 인권, 평화, 공존, 연대의 의미를 담는 투쟁들이기 때문이다.
* '최경희의 직접민주주의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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