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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회포럼의 탄생, 세계경제포럼에 맞서다
매해 벽두 스위스의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다보스에 세계 정치경제계의 거물들이 모인다. 일명 다보스포럼으로 알려진 세계경제포럼이다. 국제정치의 지배세력이 유명무실한 UN을 대체해 모이는 G8정상회담이 국제정치의 핵심이라면, 바로 다보스포럼은 자본가들의 잔치인 셈이다.
1999년 시애틀 전투의 성과와 연이은 국제적 동원으로 고조된 2000년의 분위기에서, ATTAC(금융거래과세운동연합)을 중심으로 반세계화 운동의 새로운 중심이 된 프랑스 사회운동이 세계경제포럼에 맞선 세계사회포럼의 개최를 제안했고, 당시 참여예산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험에 나섰던 브라질의 노동자당(PT)과 노동-민중-사회운동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윤(착취)의 극대화를 논하는 것이 경제포럼이라면, 사회와 인간을 논하는 것이 사회포럼의 취지였다. 동시에, 우리 운동의 대안과 전략을 논의하는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서의 사회포럼의 상이 제시되었다. 시애틀 전투 전후로 국제적 동원시에 마련된 각종 토론회 또는 대항정상회담, 민중회의 등을 전체운동을 대상으로 확장하는 시도였다.
마침내 2001년 1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 아래, 브라질 히우그란데술 주의 수도인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제1회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다. 하나의 아이디에서 출발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사회포럼은 4만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행사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국제적으로 결집한 것이다.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그 규모와 열기는 주최자들이나 제안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이제 반세계화 운동은 국제적 동원타격투쟁이라는 형태 외에도, 투쟁의 전략과 대안사회의 상을 토론하고 논의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따라서 반세계화 운동은 국제적 동원과 사회포럼, 양날개로 비상하게 되었다.
9.11 국제공안정국을 돌파하다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의 테러공격은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낳으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으며, 부시정권의 반동적 대테러 공세에 빌미를 마련해 주었다. 부시정권의 전쟁공세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우리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논리 하에 국제적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국내외적 공안정국 하에서 모든 운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부시일당은 사막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아프가니스탄을 유린했다. 그리고 시애틀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WTO는 중동의 사막 한가운데서 '도하 개발의제"(DDA)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협상라운드를 출범시켰다. 뉴욕타임즈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 "반세계화 운동이여, 안녕!"
그러나 반세계화 운동은 불사조저럼 부활했다.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의 민중봉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고, 2002년 1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다시 열린 제2회 세계사회포럼에는 전 세계 각지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원하는 6만여 명이 모였다.
더욱이 기존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슬로건에 덧붙여 제국주의 전쟁반대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제 반세계화 운동은 제국주의 전쟁반대를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받아 안은 것이다. 이로써, 반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은 하나의 운동이 되었고, 제국주의에 대항한 전 세계 노동-민중-사회운동의 대오를 형성하였다. 이제 더 이상 국제적 공안정국은 없었다.
2.15 국제반전투쟁의 산파역
되살아난 반세계화 운동은 2002년 4월 이탈리아의 총파업, 6월 스페인과 그리스의 총파업 등 노동운동의 공세 속에서 6월 바르셀로나에 30만 명이 동원됨으로써, 제국주의의 공세에 대한 저항이 보다 공세적으로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사회포럼 자체는 포르투알레그레 포럼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대륙으로, 세계 각 국으로, 또 각 도시로 확장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2002년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럽사회포럼(ESF)에 조직되어 10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00만 반전시위를 조직해 냈다. 그리고 2003년 1월에는 아시아 사회포럼과 아프리카 사회포럼도 열리게 되었다. 그밖에도 아마존 포럼을 포함 각종 주제별 포럼도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피렌체의 유럽사회포럼이 새로운 반전운동의 기치를 제안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성공적으로 마친 부시정권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 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맞서 유럽사회포럼은 2003년 2월 15일 전유럽적 차원의 반전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열린 제3회 세계사회포럼은 유럽의 호소를 받아, 이를 전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하였다. 3회 포럼은 양적으로도 더욱 성장하여, 무려 10만 명이 참여하는 초대형 행사로 발전했고, 반세계화-반전 운동의 명실상부한 구심이 되었다.
그리고 2003년 2월 15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국제적 반전투쟁이 지구상의 수백 개 도시에서 벌어졌다. 연인원 1,500만 명이 동시에 참가한 역사상 최대규모의 투쟁이었다.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규모와 차원의 투쟁이 조직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에 세계사회포럼이 있었다.
비록 국제적 반전운동은 3월 20일 미영 제국주의 군대에 의한 이라크 침략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이미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반전투쟁을 통해 이미 정치적 승리를 획득했고, 제국주의 전쟁주도세력에 정치적 치명타를 가했다. 비록 그들이 군사적 승리를 손쉽게 거두었지만, 이후 이라크 내의 무장저항이 지속되면서 제국주의 세력은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뭄바이로 간 세계사회포럼
2004년 1월 세계사회포럼은 인도 뭄바이에서 열렸다. 그동안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렸던 사회포럼이 다른 대륙인 아시아로 옮겨져서, 문자 그대로 세계사회포럼으로 확장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여러 가지 우려와는 달리, 뭄바이에도 10만여 명이 결집하여 여전히 뜨거운 해방의 의지를 재확인하였다.
또한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은 이라크 침략 1주년이 되는 3월 20일 다시 한번 국제적 반전투쟁을 조직하는 데 결의를 모아냈다. 비록 3.20투쟁이 2.15투쟁에 비해 작은 규모(약 200만명)로 조직되어 앞으로 많은 과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전세계적 투쟁의 매개체이자 결절점으로서 세계사회포럼의 역할은 여전히 중대하다.
그와 동시에, 현재 사회포럼 자체는 여러 가지 내부적 논쟁을 진행하고 있다. 사회포럼의 성격과 전망, 민주적 조직화의 문제, 정당참여의 문제, 재정문제, 개최주기(1년에서 2년으로) 변경의 문제, 의결기구인 국제위원회(IC)의 위상과 역할 등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논쟁되고 있다.
2001년에서 2004년까지, 세계사회포럼의 발전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한 국제적 동원투쟁의 물결만큼이나 폭발적이었다. 따라서 세계사회포럼의 역할이나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문제는 안팎으로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해쳐나갈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이다.
사회포럼운동이 하나의 열린 공간으로서 다양한 주체들 간의 수평적-평등한 대화와 논쟁, 협력의 계기를 내실화 함과 동시에, 다양한 일국 운동, 부문운동의 불균등성을 넘어 새로운 대안세계의 주체 형성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라는 가장 본원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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