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다! 국민발의권 국민소환권 열린 토론회'에 참여하여 짧은 자유발언을 한 적이 있다. 토론회가 시작되기 전에,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왜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를 고민하는가?'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기도 하였다.
어떤 자유발언의 내용을 준비하고 있는 그 때의 나는 부안의 경험을 중심으로 '주민자치'에 대한 발제자의 얘기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현실은 이론을 이미 뛰어넘고 진행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한국 민중운동의 역사에 1980년대에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면, 2000년대에는 '부안민중항쟁'이 기록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발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대한 민주항쟁이었다면, 부안 항쟁은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핵마피아집단'에 대한 민주항쟁이었다.
요컨대 부안 주민들의 투쟁은 정부와 핵산업계가 함께 공모하는 주민 사기극에 대한 투쟁이었다. 진정한 지방분권과 자치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제 부안은, 그 핍박과 고통의 시기를 넘어 생태문화사회로 나아가는 기회가 왔다."라고...
부안 주민들은 이러한 투쟁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의 조건과 전망'을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것의 중요함을 과도한 대가 - 주민들이 흘린 눈물, 피, 땀 등 - 를 지불하고 얻었다. 적대(敵對)가 어디로부터 존재하는지, 그 적대의 환상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공동체의 삶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형성하고 집행하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민중의 권력이 대의된 시스템에서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부안 주민들은 투쟁을 통해서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 부안 공동체는 '생태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정치적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쓰여질 두 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국가권력의 성격을 왜 묻지 않는 것인가? 둘째, 민주주의와 독재의 구도는 올바른 것인가? 셋째, 주권을 양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넷째, 직접민주주의의 조건과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부안의 얘기를 좀 더 하자. 부안의 사례를 발표하신 분은 이라크 민중과 부안 민중의 아픔이 오버랩 되었다고 얘기하였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부안 주민에 대한 국가폭력은 그 상상을 초월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발제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피터지며 끌려가는 형제자매 이웃을 보면서 더욱 더 큰 분노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분없는 이라크전쟁을 일으킨 미국과 '부안전쟁'을 일으킨 한국, 그에 저항하는 이라크 민중과 부안 군민의 처절한 슬픔이 오버랩 되어왔다." 라고.
위의 인용문은 현 단계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담론은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포함하고 있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논하지 않고서는 이끌어 갈 수 없다.
사실 국가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는 충분히 다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민주주의 투쟁과정에서 잊고 있는 국가의 본질에 대한 얘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기반 한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전체 이익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 권력의 센터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러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일상적으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그래서 공평하게 이익을 조정하고 집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국가'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아왔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는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일 때만 가능하다. 지금의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사회적 적대가 존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적 층위의 권력이 집중된 것으로서 국가는 사회적 적대를 재생산하는데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 적대가 첨예하게 드러나는 특정 국면에서 국가가 선택하는 모습들을 보면 공동체의 전체이익을 집행하는 국가에 대한 이미지는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의 견해들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공권력'이라는 막강한 물리력을 동원하여 사회적 적대가 드러나는 곳에 사회적 약자보다는 강자의 논리에 더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선택한다.
노동이슈에도, 환경이슈에도, 여성이슈에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사회적 약자의 논리를 국가가 선택하였다면, 그 만큼 사회가 받아들일 만큼 성숙할 때만이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 수준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국가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기존 국가는 사회적 적대가 뒤바뀌는 예민한 상황까지는 가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슈와 국면에 있어서는 가차없이 물리력을 동원한다. 이러한 이슈들은 현재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비정규직 투쟁에서, 이주노동자 투쟁에서, 부안 주민의 투쟁에서, 이라크 파병반대 투쟁에서,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에서 등등...
그래서 민주주의와 독재를 대립항으로 설정하는 것은 잘못된 구도이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와 '민주 대 독재', '군부정권 대 문민 또는 국민정권' 등과 같이 한국의 일상적인 정치적 담론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는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이 경험한 정치체제를 '독재체제'라고 부르고 서구 진영이 경험한 정치체제를 '민주체제'라고 호명하는 것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잘못된 전제는 잘못된 결론을 이끌고, 잘못된 과정을 만들어 낸다. 한국적 차원에서 이러한 담론이 진행된 피해는 '민주화' - 대표자를 뽑는 공정하고 경쟁적인 법·제도의 마련과 집행 - 이후 한국 민주주의 담론은 '선거정치와 의회정치' 영역으로 협소해 졌다는 점이다. 즉, 민주화라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래가 정치적 영역의 수준을 넘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영역의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를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갖고 오게 되었다.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담론의 피해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만병통치약인양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정치체제는 상정되지 조차 못하고 있다. 세계적 패권을 자랑하고 있는 미 제국주의는 호언장담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는 지구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민주'가 아니라 '독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독재의 성격을 갖는다. 단 국가유형을 구분하는 것은 그 국가가 기반하고 있는, 대표하고 있는 권력주체의 성격이 좌우될 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이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인 것이다. 이렇게 파악하는 이유는 '독재'라는 말의 어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공화정 경험으로서 정상적인 시기에는 '집정관 2명'이 최종적인 정치적 판단을 하였다면, 전쟁과 같은 위기 또는 비정상적인 시기에는 '집정관 1명'에게 권한을 몰아주는 '독재'의 시기를 설정하였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서 부르주아지 권력의 배타적 독점체제를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독재로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배타적 독점체제를 말한다. 이것이 질적 논리이다. 양적 논리로 보자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체제는 소수의 부르주아지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시스템이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체제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소수의 부르주아지를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다양한 하위의 형태들을 갖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일 수 있고, 군부독재 체제일 수 있고, 파시즘과 같은 체제일 수 있다.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체제의 민주화, 민주성의 정도로 각각의 형태들을 구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상위개념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의 권력을 배타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그들의 민주주의이자 독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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