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난감한 부탁을 하는 전화를 한통 받았다. 민주노동당에 힘을 몰아주자는 요지의 글을 써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곤란하다고 하니, 돌아온 말이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아닙니까?"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답변이 떨어지자 무섭게 돌아온 말은 심히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럼 열린우리당 지지자에요?" 이후 몇 분 동안 계속된 이 통화 내내, 전화한 이는 내 정치적 견해가 어떤 것인지 좀체 상상이 안 되는 듯했다.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이외에는 어떤 선택도 생각하기 어려운 눈치여서 마지막에 그이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민노당 비판적 지지라고나 할까요."
낯선 이에게 알몸을 보인듯한 기분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또 다른 이를 만나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가 민주노동당으로 옮겨가자, 그는 자신이 "민주노동당원이지만" 당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털어놨다. 우리의 대화는, 어떤 이야기할 때 꼭 단서를 붙여야 하는 게 착잡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민주노동당은 4월15일 역사적인 의회 진출을 이뤄낼 것이 확실하고, 잘하면 민주당을 제치고 제3당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즐거운 일이고 놀라운 발전이다. 그런데도 나는 민주노동당을 흔쾌히 지지하지 못한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정당이라고 하지만 또 하나 빼먹지 않는 수식어가 서민의 정당이라는 것이다. 노동자가 서민이 아니면 누가 서민이며, 서민 치고 노동자 아닌 이가 얼마나 될까만, 그들은 둘을 나란히 배치한다. 다른 수식을 덧붙여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기야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더 할 것이고, 그게 그들의 탓만도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답답한 현실을 개선할 의지가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전국의 '서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다른 이름이 '노동자'라는 걸 알리고 서민과 노동자가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현실이 누구 탓인지를 알릴 기회를 피하는 건 아닐까? 목, 금, 토, 일요일 나흘 연속 이어지는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오는 민주노동당 간부들 입에서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바로 그 노동자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내 기억력이 나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또 비례대표 1번이 전설적인 여성노동자라는 걸 자랑하는 건 봤어도, 유권자들에게 노동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호소하는 걸 본 기억도 없다. 그들의 구호도 '부자에게는 세금을, 서민에게는 복지를'이다.
그러니, 전국의 현장, 여성, 비정규직, 사무 노동자들이 훌륭한 여성노동자 출신 비례대표에게 기꺼이 한 표를 줄지언정, 그 한 표를 주는 자신을 떳떳하게 여기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 여성장애인에게 한 표를 던지는 유권자보다 더 당당하지 못한 '비극'이 없으란 보장이 있을까?
혹시 과민 반응이라 생각할 이들을 위해, 구차스럽게 4년 전의 일화를 털어놓는다. 당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소식을 전하는 게 내 일거리였는데, 한 당직자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줬다.
"전국을 떠돌며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이 한 지역구 선거운동을 돕겠다고 자청했는데, 오랜 투쟁으로 남루하기 이를 데 없던 그들이 첫날 모두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타났다."
그 당직자는 그들의 헌신성에 감동했지만, 나는 '작업복 차림이 득표에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걱정해야 하는 그 현실에 소름끼쳤다. 이 경험은 내 기억 속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는 게 아니라 요즘 날로 더 또렷해져가고 있다.
그래도 "아빠는 몇번 찍을 거야?"라고 물은 딸 아이에게 "12번"이라고 한 말을 거짓말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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