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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2003년 12월 24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계단 앞. 인권활동가들이 갑자기 펼침막을 펼쳐들고 본관 앞으로 뛰어감. “이라크파병철회, FTA 인준 거부, 집시법 개악 반대, 테러방지법 제정 중단”이라는 구호를 외쳤음. 순간 국회경비대 소속 의경들이 이들을 제지했고 20분 간의 몸싸움 끝에 30명 연행. 서울 시내 6개 파출소에 분산 조사. 8명 불구속 입건. 밤 11시 전원 석방. 경찰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좀 조용히 있어줬으면”하는 희망을 강력히 피력. 인권활동가들, 콧방귀 뀜.
특기사항 : 전원 지문날인 거부. 신원확인과정은 물론 조서작성 및 수사자료표까지 모든 절차에서 지문날인을 완전 거부. 이례적인 일로 평가.
episode 1.
2004년 3월 24일. 크리스마스 국회난입사건 당사자 중 1명인 행인에게 당시 조사담당이었던 송파경찰서의 형사가 출두요구. 조서에 사인이 하나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 치안유지에 바쁜 경찰을 위해 협조차원에서 출두해줄 것을 부탁. 맘 약한 행인 출두.
사인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날벼락. 열손가락 지문을 채취하라는 법원의 검증영장이 발부된 상태. 개겨봤으나 영장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어 열손가락 지문날인. 명색이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하는 행인의 입장에서 엄청 굴욕적인 상황이었음.
episode 2.
행인 : 다른 사람들은 검증영장 이야기가 없던데 왜 나만 검증영장인가?
담당 :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모두 지문을 수집했다.
행인 : 어떤 방법인가?
담당 : 동사무소와 계류 중인 다른 사건 관할 경찰서로부터 협조 받았다.
행인 : 동사무소에는 열손가락 지문이 남아있지 않을 텐데 경찰청에서 협조 받았나?
담당 : 경찰청은 협조 없었다. 동사무소에서도 했다.
행인 : 그런데 왜 내 것은 없었나?
담당 : 그건 우리도 미스터리다.
episode 3.
법률의 규정상 단지 수사자료표에 열손가락 지문날인을 위해 검증영장을 발부받을 수 없음.
검증영장은 사건 수사를 위한 증거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목적이고 수사자료표는 신원확인 및 수사자료 정리를 위한 기초조사로서의 역할 이상을 하지 않음. 따라서 법원의 검증영장발부는 법률적 근거가 없는 행위였다고 판단됨.
epilogue
당하고 있을 행인이 아니다. 그래, 뭐 까짓 거 다시 찾아오면 된다. 찾아오는 동안 싸움질하기가 좀 벅찬 감은 있다만 언젠 벅차지 않은 일이 있었냐?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행인, 갈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도대체 언제까지 전 국민의 열손가락 지문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져갈 것인가?
이 지문날인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X같은 제도이다. 자기 나라 국민들을 모두 범죄자로 간주하는 이 희한한 사고방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분분한 논리는 제쳐두고 이 지문날인제도를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이 제도가 바로 국가권력이 국가구성원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만17살에 열손가락에 검은 잉크 덕지덕지 묻히면서 그 알량한 주민등록증 발급 받겠다고 학교까지 빼먹고 동사무소로 달려갔던 기억이 우리에게 있다. 지문찍고 한 일주일 쯤 지나면 주민등록증이 나온다. 그걸 마빡에 붙이고 돌아다니며 급우들에게 “야, 민쯩 까봐~!” 이랬던 기억도 있다. 그게 우리의 성인식이었고 통과의례였다.
주민등록증이 발급된다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공적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은 그 순간부터 국민은 자신의 정보를 가족과는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독립하여 국가기관에 알려야할 의무가 부여된다. 둘째, “대~한민국 국민”들은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순간부터 자원에 의해 군 입대를 할 수 있게 된다. 즉, 국방의무 이행의 자격이 이 순간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이걸 권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셋째, 이 두 가지 의무의 부여는 공히 국가의 관리체계 안에 자신을 소속시킬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그 순간부터 국가는 주민등록증 소지자를 완벽한 관리시스템 안에 포섭시키며 이때부터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의 관리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렇게 의무를 부과하면서도 정작 권리는 부여하지 않는다. 적어도 만20세까지는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만17~19세의 청소년은 인간이 아니다. 이들은 공부하는 기계이며, 딴 생각을 머리 속에 집어넣어서는 안 되는 비인격체이며, 투표도 할 수 없는 비주권자들이며,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속하는 외계인이다. 근대법 성립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법체계는 공적 구조 안에서 권리와 의무의 동시부여를 법 원리로 한다. 즉, 하나의 공적 의무가 부과될 경우 그에 상응하는 권리가 동시에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만17세에 하다 못해 자기 열손가락 지문까지 갖다 바치면서 충성서약을 하고 의무를 지게 되는데 알량한 권리는 보장받지 못한다.
투표권만 예를 들어도 그렇다. 선거법 개정당시 선거연령을 낮추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었다. 현행 만20세부터 부여되는 투표권을 만19세부터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참정권 행사의 한 방법인 투표권은 분명 공법상의 권리이다. 그렇다면 선거연령 하향조정의 근거 역시 공법상의 법원리를 전제로 논의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만19세 선거연령 하향조정의 근거는 공법상 법원리가 전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대학 1학년 생 중 상당한 수가 만20세가 못되어 투표를 못하므로 적어도 대학을 들어간 사람에게는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먹구구도 이 정도면 코미디다. 그럼 만14세에 검정고시로 대학 들어간 학생은 투표권 왜 안주나? 투표권 줄라면 지문날인 하고 주민등록증 발급 받는 그 순간부터 줘야한다.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찍는 지문. 바로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권력기관이 국민 알기를 개떡같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관리되어야할 대상은 오히려 국가이다. 국민에 의해 관리되고 국민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소박한 원론이 아니었던가?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해 놨다. 그런데 이 휘황찬란한 선언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 전락해버렸다. 국민은 주민등록번호로 줄서기를 해야 하고 열손가락 지문을 알뜰하게 찍어주어야 하고 언제 있을지 모르는 국가기관의 검열을 하자 없이 진행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인들이 그렇다. 오만방자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가끔 행인처럼 닭장차 타고 경찰서 출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지문날인이라는 거 관행적으로 해주어야하는 의무처럼 되어버렸다. 신체정보인 지문이 중요하기는 일반인이건 형사피의자건 마찬가지이다. 일단 경찰서에 들어가면 무작정 지문날인을 하고 나와야 한다. 이건 근거도 없다. 국가의 안위와 민중의 질서를 고민하며 권총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떡대 좋은 형사들이 지문 찍으라고 할 때 웬만한 사람들 그냥 아무 말 없이 지문 찍어준다. 안 찍는다고 버티면 이제 영장을 받아온다. 그 영장을 청구하는 검사나 영장을 발부하는 판사나 지들이 들고 다니는 영장이 증거수집을 위한 영장인지 아니면 단순히 수사자료표 작성을 위한 영장인지조차 구분을 못한다.
이야기 무척 장황하다. 그러나 결론은 이거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웃기는 소리다. 국민 알기를 재고상품 정도로 알고 있는 권력기관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나 법치주의는 흰 소리일 뿐이다. 17대 국회여. 지문날인제도 좀 철폐해라. 누가 할래? 찍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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