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으로 온 나라가 술렁이는 가운데, 울산에서는 13일,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한 달 전에(벌써 한달이나 되었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를 외치고 분신한 박일수 열사를 추모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는 절규였다. 집회 자체는 탄핵 정국에 정신 못 차리는 지도부들 때문에 상당히 맥빠진 분위기로 진행되기는 했더라도 말이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된 후 세상은 아비규환이다. 하루만에 비자금으로 수사를 받던 대기업 임원이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저녁에는 노사모 회원이 분신을 했다. 새벽에는 전직 북파공작원이 차량으로 국회에 돌진하기도 했다. 국회 앞에서,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빼곡히 가득 차 촛불시위를 한다. '민주주의를 살려내라'는 것이다. 대통령 자리가 대단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이쯤 되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독자들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왜 어떤 죽음은 외면당하고 어떤 죽음은 언론에서 생중계 하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는 목숨 값도 차이가 나냐?" 그래, 하지만 한발 더 나가보자.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든, 노사모 회원이든, 비록 대기업 임원이든, 그 절박함과 진실성에 대해 부정하고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된다. 각자의 삶이 추구하던 가치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때 절박함이 나오게 된다. 박일수 열사에게는 비정규직으로서의 삶을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절망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럼 분신한 노사모 회원은? 물론 그 분도 우리 정치에 대한 절박함이라는 진실이 있다. 새벽에 국회를 자기 차로 들이받은 시민도, 광화문에 8만이나 모였다는 촛불시위 인파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투신한 대기업 임원에게는 죄송하지만 최소한의 이타적 진실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말씀은 드려야겠지.
이쯤 되면 독자들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당신도 노빠요?" 하고 물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이 모두 '노빠'이기 때문에 모인 것은 아니다. 한 선량한 시민인 내 친구도, "노무현은 혐오하지만 탄핵은 폭거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며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아마 주위에 그런 분들 많을 거다. 다만 우리는 왜 그 절박함들이 이렇게 상이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지 물어야한다.
박일수 열사를 우리가 '열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은 자신의 절박함의 이유를 뚜렷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든가,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착취하는 정권과 자본의 노동불안정화 정책에 대해 모두 알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거리의 촛불 시위 인파들도 알고 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가 완전히 망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그것을 구제할 능력이 완전히 없다는 것을 탄핵파동을 통해 증명해주었다. 사람들은 이제 절망한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까지, 통치자들이 모두 사기꾼들이며, 이 정치기구 자체가 구제불능에 빠졌다는 것을, TV생중계를 통해서 똑똑히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에 달려간 내 친구처럼, 그리고 엊그제 분신한 노사모 회원처럼, 대중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지배정치의 깽판에 분노할 대상을 찾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제대로 걸려들었고, 열우당과 노무현은 그것을 교묘하게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 바꾸어내고 있다. 마땅히 그 대중들에 의해서 끌려 내려와야 할 인간들이 연단에서 열우당과 노무현 지지를 선동하고 있다. 제도언론은 마치 두 개의 입장밖에 없는 것처럼 말한다. 탄핵찬성=한나라당/민주당지지, 탄핵반대=열우당, 노무현지지!
그러나 이런 광란 뒤에 남는 것은 더 깊은 공허함뿐이다. 탄핵반대를 외치는 광화문에는 분노하는 대중들이 있을 뿐이지, 분노의 원인은 채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분노의 정념은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들을 분노하게 하는 현실을 바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열우당과 노무현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지난 대선 이후와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 될 것이다. 아마도 더 짧은 시간 안에 대중의 환멸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승리한다면 이제까지 열심히 해오던 짓거리 계속할 것이 뻔하다. 현대판 노예제도 비정규직 확대(이용석, 박일수 열사), 노사관계 로드맵 추진 등 노동운동탄압(배달호, 김주익, 곽재규, 이현중, 이해남 열사) , 농민 다 죽이는 시장개방(이경해 열사).. 이런 정책들이 직접적으로 작년의 그 억울한 죽음들을 강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더 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최소한 광화문에 지금은 촛불을 들고 모이는 대중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깽판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판 자체를 뒤집을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공허함과 절망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일수 열사의 유서, 첫 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자.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차피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 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좃지나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재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차별과 멸시, 박탈감, 착취에서 오는 분노.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 분노가, 죽음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투쟁이 될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자들의 어깨에 책임이 막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