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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정국에서 좌파가 대중들로부터 고립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간단하다. 민주노총 같은 민중연대 소속의 대중조직들이 '범국민행동'에 들어감으로써 좌파는 간단하게 고립되었다. 좌파의 대중정치가 대중조직들을 매개로 해서 행해질 수밖에 없는 한, 대중조직들과 떨어지게 된 순간부터 좌파의 활동공간은 크게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을 직접 접촉하는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대세를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다.
물론 좌파 고립의 원인을 이렇게 대중조직들에 돌리면서 좌파를 변호하려는 것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다. 또 좌파정치의 핵심이 대중조직의 장악에 있고, 따라서 민주노총의 각급 노조수준에서 좌파성향의 위원장을 내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좌파와 대중조직간의 이 괴리문제가 그 성격을 달리 하면서도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 내에서도 재현된다는 점이다. 조합원 대중들의 직접적 이해관계와 요구수준은 노동조합 존립의 근거이지만, 노동조합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산별이나 총연맹의 형태로 조직될수록 개별기업이나 개별산업의 직접적 이해관계는 산별이나 총연맹의 높은 요구수준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노조지도부가 어떤 요구를 가지고 어떻게 투쟁하는가의 문제에서 지도부는 조합원 대중들과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고, 어떤 지도부를 구성하느냐를 둘러싸고 노동조합 정치가 전개된다. 조합원들이 지도부를 불신하는 순간, 지도부는 간단하게 무력화되고 좌파든 우파든 노조활동가들은 대중들로부터 고립된다.
좌파와 대중조직 그리고 대중간의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규정적인 힘은 대중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대중의 힘은 그 자체 독립변수가 아니다. 대중의 힘, 즉 대중의 정서, 의식 그리고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자본주의 질서의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여러 수준의 복잡한 관계들로부터 나온다. 또한 대중조직을 장악하려는 좌파의 정치, 대중조직 내에서의 조합정치도 역으로 대중의 힘을 결정하는 이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대중의 힘, 운동이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어있지 않다. 또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을 지향해가는 것도 아니다.
대중이 자발성을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을 지향해 나아간다면, 좌파의 정치는 대중의 정서와 실천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좌파의 정치는 단순하고 쉬운 것이며, 사실상 특별하게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 착취질서는 착취의 직접적 효과로서 대중들로 하여금 이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고 이 질서를 전복하도록 혁명적 정서를 고양시킬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질서에 기반한 각종 지배이데올로기를 통해 대중들로 하여금 자본주의를 승인하고 그것에 적응하도록 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그 때문에 대중의 요구와, 자발성, 그리고 자연발생성은 언제나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며, 여기에 좌파와 그 이데올로기의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개입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대중의 정서, 의식, 행동의 구체적, 역사적 양태는 언제나 이 두 개의 효과와 좌파정치 개입의 잠정적 결과로서 나타난다.
대중운동과 좌파정치의 결합은 따라서 쉬운 일이 아니고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좌파정치는 자본주의의 변혁 또는 그 변혁으로 이어질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지향하는 반면, 대중의 운동은 직접적 실천에서 비롯되는 낮은 수준의 요구들로 시작한다. 그 요구들은 대중운동의 발전에 따라 높아지는데, 운동과 요구수준은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좌파정치와의 결합 속에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모순은 이런 것이다.
좌파의 정치는 대중의 운동과 결합하지 않으면 힘을 가질 수 없으므로 대중과 함께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대중의 운동은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낮은 요구수준에 입각해 있고, 또 많은 경우 그 이해관계와 요구수준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어있다. 대중과 함께 낮은 수준의 요구투쟁 속에서 어떻게 좌파는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올바로 인식하게 하고 보다 높은 수준의 요구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대중 자체를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성장하도록 하면서 말이다. 탄핵국면에서 좌파에게 요구된 것은 말하자면 바로 이런 종류의 정치이다.
탄핵국면이 조성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대중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왜곡하고 반민중적인 신자유주의 지배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면, 좌파는 이를 대중적으로 폭로, 선전하고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 국면에 개입해야 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간의 탄핵대결에서 낡은 보수주의를 심판하는 문제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신자유주의와의 대항전선이 주요하게 설정된 정세에서 좌파가 이 전선을 포기할 만큼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과 함께 대중 속에서 탄핵국면의 본질을 폭로하고,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자립적인 대항 축을 강화하여 총선국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중조직들과 결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그 대중조직들이 떨어져나갔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대중조직들이 떨어져나가지 않았다면, '범국민행동'에 대항해서 좌파가 활동할 수 있는 자율적 공간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탄핵문제에 대한 대중의 태도도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탄핵정국에서 민중연대의 대중조직들이 '범국민행동'에 참여한 것을 그렇게 비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대중조직들도 탄핵에 대한 대중의 반대 정서를 따라 그런 정치적 결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는 대중조직 내의 실용주의적 경향이 관철한 결과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와 대중조직 내에서의 주도권 다툼 자체가 대중투쟁의 결과라는 점에서 좌파는 이 투쟁에서 실패했고, 실패의 결과는 신자유주의의 압도적인 물결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지배의 역사에서 이런 패배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그것이 한국 좌파의 무능력이고 실력부족이다.
이 무능력은 단순하게 대중조직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대중과 대중조직을 둘러싼 좌파정치의 모순과 딜레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능력이다. 맑스주의를 자처하는 3인의 교수가 단순하게 탄핵을 반대하고 자유주의 개혁전선으로 넘어간 것도 이런 무능력의 표현이다.
탄핵반대와 보수정치 심판을 내걸은 시민단체들의 전투적인 활동과, 무엇보다도 TV 방송3사들의 대대적인 여론몰이는 탄핵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를 결정짓는데 결정적이었다. 신자유주의 세력인 이들의 역할은 이번만도 아니어서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시민단체와 방송사들이 그렇게도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한 데에는 대중조직들이 이들에게로 넘어감으로써 좌파가 무력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탄핵에 대한 대중의 압도적 반대와 자유주의 지지 하에서 좌파의 무력함은 더욱 증폭되어 나타났다. 대중조직들까지 시민단체들과 결합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방송사의 보도 앞에서 좌파가 어떤 활동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민주노총 등이 '범국민행동'에 참여하지 않고 민중연대가 반신자유주의 민중운동의 관점에서 탄핵국면에 개입했다 하더라도 탄핵반대, 보수정치 심판, 자유주의 지지라는 대중적 정서를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 경우 좌파단체만이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조직들까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앞서도 말한 바처럼 이런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이런 가정은 좌파 정치와 대중의 운동에 관한 모순과 딜레마를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 좌파 단체와 대중조직들의 반신자유주의 대중활동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다수가 탄핵문제에 대해 좌파와 관점을 달리 하고 자유주의 지향의 태도를 표출한다면, 이런 상황에 좌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민중탄핵이 옳더라도 민중탄핵을 정말 민중운동의 요구로서 제출할 수 있는가라는 신기섭 기자의 문제제기도 사실 이런 문제라 할 수 있다.
탄핵국면에 대한 가상적인 질문이지만, 이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는, 거창하게 말하면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에서, 또 보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정치와 노동조합 정치에서 좌파가 직면하곤 하는 대중과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둘러싼 투쟁에서, 또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서 조합원대중과 좌파활동가 또는 노조활동가들 간에는 적지 않게 이런 모순이 개재되어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의 절반이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에 포섭되어 있는데, 그 어용노조도 궁극적으로는 조합원대중들의 뜻이 관철된 것이다. 어용노조에 대항하는 민주화투쟁에서 조합원대중은 단일하게 민주파의 지도를 수용하려 하지 않곤 한다.
구조조정을 둘러싼 투쟁에서도 문제는 단순하게 실용파 지도부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실용파 지도부를 선택하는 것은 조합원대중이고, 이런 대중을 상대하는 좌파활동가의 어려움을 좌파의 무능력이라고 질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대중은 투쟁적이고 혁명적인데, 지도부가 실용파라서 운동을 망친다는 주장은 좋게 말해도 모순적인 현실의 일면일 뿐이다. 지도부가 좌파이고 전투적인데 대중이 따라오지 않아 지도부가 고립되는 상황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투쟁에서 본 바처럼 현실적 상황이다. 이럴 때 좌파 지도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위의 질문에 내포되어 있다.
또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진행된 구조조정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식은 어떠한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대다수의 국민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김대중 정부의 최대의 치적이 경제구조조정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노동조합들은 여론에 의해 압박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조합은 그러면 국민의 요구에 따라 구조조정을 수용해야 하는가? 한국정치를 보면 더 하지 않는가?
역대 선거에서 (극우)보수당과 자유당에 대다수의 표를 던져왔고 지금도 민노당에 대한 지지율은 5% 남짓한 척박한 현실, 무엇을 했는지 정치적 실적도 별로 없는 정동영이라는 인물과, 1년여의 집권기간에도 지긋지긋하다고 비난받던 노무현 정권이 개혁의 기수인양 압도적인 지지를 몰아가는 현실, 사민당·공산당과 연대하는 서구의 녹색당-시민운동과 달리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는 환경연합 등 한국의 시민운동, 이들도 이런 대중의 정서를 쫓고 있다.
이 대중의 어느 곳에서 혁명성을 읽을 수 있나? 이런 현실을 가져온 대중이 75%의 압도적인 탄핵반대 여론을 가져온 그 대중과 다른 대중인가? 신자유주의 강화가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탄핵반대 대중을 쫓아가는 3인의 맑스주의자는 왜 구조조정의 문제에서는 국민 다수의 여론을 쫓아 노동자들로 하여금 구조조정을 수용하라고 선전하지 않았는가? 전투적인 지도부를 따라가지 않는 조합원 대중들을 보고 왜 대우차 지도부에게는 대중을 따라 투쟁을 포기하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차원을 달리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에서 권력을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근본적으로는 이런 성격의 현실, 대중과의 모순에 직면하곤 하였다.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레닌에게는 두 개의 선택이 가능했다. 어떤 때는 대중의 정치적 지향이 볼셰비키와 다르더라도 볼셰비키의 결정을 대중에게 강제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대중에 양보해서 우회로를 찾기도 했다. 어떤 선택이 옳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의 문제가 아니다.
내전 후 신경제정책과 그에 따른 농민정책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소농경제가 지양되어야 하더라도 당시 러시아 대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농업부문에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레닌은 소농경제를 인정하고 협동조합이라는 우회로를 찾고자 했다. 이는 분명 대중에 대한 양보였다. 그러나 레닌은 이 양보가 승리라고 선전하지 않았고, 그것이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후퇴라는 것, 그러나 대중을 억압하고 그들과 적대해서는 사회주의 건설을 이룰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사회주의로 가는 우회로를 만들어갈 것을 역설하였다.
3인의 맑스주의 교수들은 대중의 운동과 좌파정치 간의 이런 모순관계를 기본적으로 이해할 줄 모른다. 이들은 (그리고 남구현 교수는 분명하게) 구조조정 투쟁에서 혁명적인 조합원대중과 우파 지도부라는 단순한 대항관계 설정을 통해 어떤 때는 대중의 혁명성을 쫓아야 한다고 하고 어떤 때는 좌파 지도부만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대중추수주의와 좌파 엘리트주의를 넘나들었다.
그렇게 보면 지금 탄핵국면에서 민주주의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정서를 쫓아가는 대중추수주의는 이들에게 새로운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라면, 노동자들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우리사회의 신자유주의 전환을 저지하는 진보적 성격의 투쟁이었던 데 반해, 대중의 지지를 받더라도 탄핵반대 투쟁은 신자유주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는 점에서 결코 진보적인 성격을 가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투쟁을 반혁명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선전함으로써 좌파로서의 그들의 명성은 쪼개지고 말았고, 이것이 이들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들의 변신을 아직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이성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위의 질문에 이제 답을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좌파단체와 대중조직들의 선전활동과 대중활동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정서가 탄핵반대로 나아간다면(나는 이런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좌파가 대중과 적대해서 좌파의 관점을 강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좌파는 권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좌파가 대중을 따라 탄핵반대 전선으로 간다 하더라도, 좌파는 이런 양보를 3인의 교수처럼 민주주의 투쟁이나 혁명적인 투쟁으로 각색해서는 안 된다. 좌파는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투쟁에서 후퇴라는 것을 승인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 폭로하여 대중과 함께 탄핵국면을 돌파해 갈 우회로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좌파의 무능력은 좌파의 문제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대중 자체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물론 대중의 운동과 좌파정치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좌파의 고유한 무능력에 대해서는 비판을 면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좌파가 대중과의 소통과 교류에서 부딪치는 일종의 벽 같은 현실을 대중의 혁명성이라는 상투적인 문구로 치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
좌파에 대해 환멸을 운운한다면, 대중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좌파도 있을 것이다. 좌파는커녕 대중조직의 활동가조차도 이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할지 모른다. 이 상호작용이 한국의 좌파가, 대중이 살아가는 척박한 토양을 이루는 것이고, 이 현실은 주지하다시피 좌파에게 불리한 현재의 세계사뿐만 아니라 한국에 고유한 특별한 역사, 계급투쟁의 조건 및 그 역사와 관련되어있다.
3인의 교수들이 뒤집어씌우듯이 한국의 좌파가 이념적 순결성만 내세우고 민주주의 투쟁을 거부해서 대중들로부터 고립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좌파는 노동자계급만의 요구를 제출하지도 않았고, 민주주의 투쟁에서 언제나 선봉에 섰었다. 또 구조조정 투쟁에서나 민주주의 투쟁에서 좌파가 높은 수준의 요구를 제출했던 것도 아니다. 행여 이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특정 정파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대중의 직접적인 이해를 담고 있는 낮은 수준의 요구조차 한국의 대중에게는 수용되기 어려웠고 대중의 운동과 결합되기가 어려웠다. 이는 좌파에게도 환멸이 아닌가?
이제 이 글을 정리하자. 맑스주의 3인의 교수는 탄핵국면을 맞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니 반파시즘 통일전선이니 하는 정세에 어울리지 않은 정치학 지식을 늘어놓으면서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는 현 정세를 공화국의 위기로 각색하고 신자유주의의 강화에 기여하였다. 이들은 대중추수주의와 좌파 엘리트주의를 넘나들면서 극우반동의 청산문제가 그래도 날카로웠던 시기에는 진보진영의 우파에 대한 비판적 지지조차 거부하고 사회파시즘론에 빠져 있다가,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현재의 시기에는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전하고 있다.
이는 3인의 정치학 전공자들의 빈곤한 정세분석 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은 또 대중의 운동과 좌파정치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고 좌파의 정치를 이론적으로 정치적으로 황폐화시켰는데, 당면한 투쟁에서 자유주의 개혁전선으로 넘어간 것은 그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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