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선거를 여는 사람들의 총선이야기 Another0415
전선의 작명
강내희 (중앙대 교수) 읽음: 5772
작성일: 2004년03월21일 21시29분21초
지난 3월 12일 이후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정국이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각 세력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 하나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싸움의 이름을 선택하는 일이다.

지금 형성된 정치적 국면을 가리키는 가장 공통적인 용어는 '탄핵정국'일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야당의 탄핵으로 사회적 긴장이 일어나고 있으니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탄핵이 추진된 원인이나 이후의 추이, 그리고 사회 제 세력의 반응들을 살펴보면 현재의 국면을 탄핵정국으로만 부를 순 없을 것 같다. 지금 여러 진영이 피 터지게 싸우는 가장 큰 이유는 4월 15일의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려는 데 있다. 탄핵정국은 그렇다면 '총선정국'이다.

동일한 대상, 사안을 놓고 '탄핵정국', '총선정국' 가운데 어떤 이름을 쓸 것인지 신경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상은 그 이름에 의해서 성격이 크게 규정된다. 작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인데, 아무나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이름을 부여할 권한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각 사회세력이 벌이는 경쟁에는 이들의 싸움판 즉 전선의 작명을 놓고 벌이는 것도 있다. 한민자당의 '친노 대 반노', 열린우리당의 '개혁 대 보수', 범국민행동의 '민주 대 반민주', 그리고 우리 진보세력의 '진보 대 보수'가 목록에 올라 있는 이름들이다.

(보수적인 한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꽃을 꽃이라고 부르기 전에 꽃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꽃은 꽃이라고 불릴 때 비로소 꽃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금의 싸움을 진보 대 보수의 대결이라 부를 것이냐,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이라 부를 것이냐에 따라서 같은 싸움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오늘의 전선을 '진보 대 보수'의 대결로 불러야 하는 것은 거기에 우리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명과 같은 상징적 조작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되겠다. 총선정국을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작명하는 것만으로 정국의 향방이 갈리겠는가. 태어나는 아이의 이름을 지어 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도 작명자의 사회적 권위가 낮으면 아이는 이름 값을 하기 어렵고, 더 큰 힘을 지닌 누군가가 새 이름을 지으면 그 이름으로 불려버린다. 이때 이름은 한편으로는 자체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지만 동시에 또 다른 힘, 그 이름을 통용시키는 사회적 힘의 영향도 받는 셈이다. 진보세력이 독자적인 전선의 이름을 갖는 것 못지 않게 그 이름을 지켜내는 힘이 그래서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일은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이미 많은 동지들이 탄핵을 강행한 수구보수 한민자당만이 아니라 '개혁적'이라는 열우당과 그 지지세력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임을 간파해냈고, 지금 예측대로 열우당이 다수당이 될 경우 그동안 한나라당이 노무현정부가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한 덕분에 가끔 저지되던 신자유주의 개혁이 더 큰 추진력을 갖게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진보적 동지들은 광화문의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정확한' 인식을 제시한다. 지금의 정국을 보수 반민주세력과 1987년 이후의 민주화 흐름을 이어가려는 민주세력이 대결하는 구도라고 보는 정국 규정은 후자가 민주개혁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해온 사실을 외면한다는 상황인식이다.

지난 1년 넘게 노무현정권이 이라크파병, 교육시장개방,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 교육행정정보시스템 도입, 인터넷실명제 추진, 집시법 개악 등을 주도해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우리가 개혁세력을 지지할 수는 없다. 현재의 전선을 가리켜 '진보 대 보수'로 불러야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 수구반동보다 낫다고 보는 안이한 정세판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문제는 이런 분석과는 별도로 진보의 힘을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 국면을 보수세력들간의 싸움이라고 규정을 하고, 더 중요한 싸움은 진보 대 보수라며 판 갈이를 주장해도 그런 외침은 너무나 작게 들릴 뿐이다. 흔히 부르주아 시민운동의 위상이 올라간 것은 언론의 지원으로 그 대의가 튀겨졌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와 함께 노동자운동 등 민중운동이 외면을 받는 것은 언론이 외면한 때문이라는 말도 따라 붙는다. (진보세력이 한겨레신문을 비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지금 광화문을 보면 진보세력의 이런 진단이 늘 옳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쪽수는 언제나 우리편이라고 했는데도 대중성에서 밀리고 있지 않은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지금 상황은 진보세력의 과제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고유한 이름을 갖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작명의 효과는 이름을 이름에 걸맞게 만드는 노력과 함께 유지된다. 지금 국면을 진보 대 보수의 대결로 보는 것 이상으로 이 정세 규정을 상식으로 만들고 현실화하는 힘이 필요하다. 지금 개혁과 민주로 통용되는 세력은 사실상 보수이며, 우리가 진정한 민주개혁이요 진보임을 대중이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작명법을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해왔지? 왜 우리는 늘 사태의 본질을 안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개입도 하지 못하고 지기만 하지? 우리에게는 혹시 '무능'이 내장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이 무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가 탄생시키려는 아이의 이름은 허명으로만 남을 것 같다. 진보의 관점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점만으로는 모자란다. 우리의 판단력, 분석능력만이 아니라 생산적 역능을, 문제제기만이 아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예를 들면 사회를 우리 식으로 경영, 운영할 수 있는 능력까지 길러야 한다.

가령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정치와 경제와 문화 전 분야에 걸친 우리의 사회운영 청사진을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대중과 만나는 노력도 해야 한다. 우리한테 그런 여유가 있느냐고 하지만은 말자. 입장을 세우는 일과 힘을 기르는 일은 어려워도 함께 해야 한다. 동지들, 좋은 방향, 대안,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면 공유들 합시다.
 
도도 저는 궁금합니다. 노무현을 민중의 손으로 탄핵하자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탄핵하고 난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꾸어지나요? 늘 지배당하고 통치당하는 것에 길들여온 민중은, 대통령의 부재, 자체로도 대단한 공포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대통령 탄핵 이후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거부감만 부추기게 될 겁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 제대로 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못한(진보정당의 구호는 왜 언제나 허공에 붕 뜬 이상처럼만 들릴까요. 진보정당이 의회에 진출한다 해도 어차피 소수당에 머물텐데, 그 상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이를 테면 자유무역협정 같은 사안이 있을 때, 민노당이나 사회당이 조금이라도 의석 수를 가지고 있다면, 비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진보정당이 단지 의회에 진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이 사이트에 상당 부분 공감하면서도, 주변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위의 질문들에서 막히고 맙니다. 시원한 대답 없을까요...
03/21 22:29
늘푸르미 강내희 선생님의 지적이 역시 시원합니다. 능력과 실력없이 비판만 해서는 더이상 대중들이 따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03/21 23:14
진솔한 성찰 진솔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강내희 선생님의 말씀처럼 진보진영이 '허명'과 '무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처럼 진지하게 우리들이 성찰하기 시작한다면 그 가능성은 열리리라 봅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며, 조금 혼란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참으로 고맙습니다. 03/22 15:59
삐딱선 도도/하신 질문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청사진'을 갖추기만 하면 '소수당'이 아닌 '다수당'이 될 수 있는 의석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몇 번의 '소수당'을 겪으며 의석수를 늘려가야 '다수당'이 될 수 있는 것일 테고, 사실은 그렇게 '몇 번의 소수당을 겪는' 과정 자체가 '청사진'을 '제대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겠지요.

아, 그리고 한 마디, 물론 지금의 우리의 '청사진'이 그리 '제대로 된' 청사진일 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그래도 그리 부정적으로 볼 것은 많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03/22 17:17
또또 도도님 대안을 내놓아도 외면을 합니다. 새만금 사업이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대안은 내놓을때 어디에 계셨어요? 그 당시에 태어 나지 않으셨나요? 03/2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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