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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복지의 위기
미국은 시장의 천국이다. 미국의 의료제도는 이러한 시장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움직인다. 그러나 이를 잘못 이해하여 국가나 사회적인 빈곤구제 프로그램이 부재하거나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국가나 사회적으로 진행되는 빈곤구제나 정책, 프로그램은 서유럽 국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다.
1930년대에 뉴딜정책으로 노령보험, 실업보험, 빈곤을 경감하기 위한 공적제도가 도입되었으며, 1960년대 '빈곤과의 전쟁'속에서 노인의료보험제도(Medicare), 국민의료보장제도(Medicaid) 등이 도입되었고, 그리고 인종·성차별주의적인 고용과 교육정책에 의해 입었던 피해를 일소하기 위한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 등이 취해졌다. 우리나라 사회복지계에서 내놓는 프로그램이나 정책은 대부분 미국에서 시행되는 것들이다.
1999년 기준으로 미국의 복지지출은 GDP대비 16.3%, 정부지출대비 28.8%로 같은 기간 한국의 5.3%, 10.8%에 비해 세배에 달한다. 이러한 복지지출 비중은 서유럽의 복지국가모델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아무도 복지국가라 하지 않고 '복지후진국'이라 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시장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복지재정지출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거나, 시장을 활성화하는 방식의 하나라는 얘기이다.
미국의 복지제도는 철저하게 시장과 민간에 맡겨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복지제도는 실업자 및 반(半)실업자에게 직접적인 현금(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에 이들에게 일할 것을 강요한다. '노동과 연계된 복지'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자리의 대부분은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이 대부분이며, 공공서비스로 여겨지는 일자리의 대부분이 이들 실업자 및 저임금노동자,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만큼 공공서비스 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는 줄어든다. 또한 이들을 고용하는 기업에게는 고용지원금 및 감세조치가 취해진다.
청년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세제상의 혜택을 지원하겠다는 우리나라 정부의 일자리 대책도 이와 비슷하다. 여성에게는 '아이를 키우는 것'마저 박탈하고, 저임금 일자리로 내몬다. 그것은 아동을 키우는 데 지원하는 재정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아동보호기금이 삭감되면서 이들 빈곤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의 지위를 강요당한다.
한편 미국 정부는 정부가 주관하던 복지프로그램을 종교기관 등 민간기관의 프로그램으로 위임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홈리스를 위한 보호소와 무료식당, 그리고 여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에 연방정부의 보조금이 사용된다. 그리고 부시정부에 들어와서 종교기관에 연방보조금을 확대하고 기업의 기부 상한액을 10%에서 15%로 올릴 것을 주장했다. 연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순이익을 올리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고경영자인 빌게이츠가 사회사업에 년간 최고액의 기부금을 내는 것이 사실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기부문화와 그것으로 창출된 재정으로 인한 사회사업이 가장 활발한 곳이 미국이다.
하지만 빈곤노동층에 대한 직접적인 정부지원이 줄어들고, 대신에 빈곤구제와 일자리 창출을 하는 종교기관을 비롯한 민간기관에 대한 지원은 확대될 수록, 복지수급자가 저임금 일자리로 흡수될수록, 기부금의 크기와 내는 기업의 수가 많아질 수록, 미국내에서조차 기존의 미국의 정치체제와 사회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복지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는 비판의 강도는 점점 세어지고 있다.
'미국 '복지의 위기'는 세가지 측면에서 거론되고 있다.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은 감소되기는 커녕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며, 경기침체와 실업의 증대, 불안정 고용은 사회서비스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계층을 증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빈곤선 이하에 살고 있는 여성과 아동의 수는 지금 시기 최고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감세조치와 군수부문에서의 지출의 증가는 복지부문에 대한 재정지출의 감소를 가져와 신자유주의적인 복지모델을 한층 강화시킬 것으로 보여 복지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미국 내 진보진영의 목소리도 아울러 커지고 있다.
아름다운 이들이 많아지는 한국사회
모든 면에서 '미국 따라하기'를 즐겨하는 한국 사회도 복지모델에서 IMF 경제위기 이후 미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 실업자에게 노동에 따른 복지를 연계시키는 자활사업의 강조, 수급자 기준을 강화함으로써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로 노동빈곤층을 양산하고, 노동시장을 최대한 유연화하여 비정규직은 이미 노동자층의 반이상을 차지한지 오래인데, 지금에 와서는 비정규직 차별해소대책이라는 미명하에 임금피크제, 기업연금제의 도입, 정규직노동자의 양보를 강조한다.
그리고 정부는 비정규직차별해소라는 명목하에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 및 세제지원, 인센티브의 제공 등의 정책을 앞장서서 제출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사회적 일자리 대책이라는 명목하에 공공서비스 일자리를 대부분 비정규직 일자리로 채워나가고 있으며, 비록 일부 공공부문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대책을 지니고 있으나, 대부분 남성노동자, 극소수에 국한된 대책일 뿐이다.
한편 보편적 복지를 지향한다는 '참여복지 5개년 계획'은 개인·시민·기업·종교계 등 다양한 주체의 사회복지 참여를 제고하기 위해 공동모금 및 기부제도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 지원 등을 강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최근 중앙일보가 '위 스타트'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모두(We)가 나서 빈곤층 아동들의 출발(Start)을 도와주자'라는 취지의 시민운동이다. 여기에는 30여개의 민간 시민·복지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100만에 달하는 빈곤아동을 상대로 질병 치료와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가난대물림을 해소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이 운동이 대중적으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다고 해도 과연 그들의 목적은 달성이 될까? 사실 이미 이러한 운동은 이미 이전부터 전개되고 있다. '아름다운 재단'이 그러하며, 이와 연동된 수익금의 1%를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가게'가 그러하다.
재벌과 자본의 이익을 가장 충실하게 대변해주는 중앙일보가 매주 신문지면을 크게 할애하여 이들 '나눔의 정신'을 실현하는 활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전의 불우이웃돕기 운동도 따지고 보면 사실은 '나눔의 정신'에서 출발한다. 또한 최근 순수민간단체로 재창립된 실업극복국민재단은 일만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지난 4월 산업자원부가 환경재단과 공동으로 유한양행 창업자 고(故) 유일한 박사를 제1회 이달의 기업인으로 선정하였다. '이 달의 기업인상'은 반기업 정서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건실한 기업경영과 사회공헌을 통해 경제발전에 기여한 기업인에게 주어진다고 한다. 이 상의 취지대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하면서 1930년대에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했고, 1960년대에는 주식을 공개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그리고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늘리고 정직하게 납세하며,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는 경영이념을 지녔었다.
특히 기업인상 시상식에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도 참석해 "노동자를 생산의 도구이자 돈을 벌어주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기업을 키우고 사회에 기여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도와주셨던 '아름다운 기업인'이었다"며 고인을 기리기도 하였다.
올해 민주노총은 임단협교섭에서 임금인상분의 5%를 갹출하고, 기업도 그만큼의 기금을 출연하여 공동기금을 형성하자는 요구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기금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복지기금, 직업훈련,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기금 등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어찌보면 비정규직의 고통을 정규직이 같이 나누고, 여기에 기업도 같이 동참하게 하여 사회적 연대정신을 구현하자는 취지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실업단체와 연대하여 간병인이나 가사도우미 등 이른바 사회적 일자리를 만드는 데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겠다고 하고 있다.
아름다운 정신은 사회적 빈곤을 해결할 것인가?
정부, 기업,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노동계까지 총망라하여 나눔과 연대의 아름다운 정신을 실천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불우이웃'이 사라지거나, 사회가 '아름다움'으로 철철 넘쳐난다는 얘기는 언론의 '미담 소개'차원에서 기사거리가 될 지언정 사회가 그렇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악화된다는 보고서만 더욱 늘어난다. 한마디로 '밑빠진 독에 물붇기'가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시민'의 '아름다운 마음과 주머니속의 쌈짓돈'은 그 선량한 의도와 마음씀씀이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한 바는 달성되지 못한다. 최근의 룡천역 열차폭파사건을 계기로 불타오르고 있는 이북동포돕기운동에 대해 같은 언론사는 '불우이웃돕기'식으로는 한계에 달했다며, 이북사회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을 해 눈길을 끌었는데, 그렇다면 현재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 '사회적 빈곤'을 위한 대책이 '불우이웃돕기'식이 되지 않을려면 빈곤노동층의 자생력을 키워주어야 하는데,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로는 도저히 자생력이 생길 여력이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단순계산만으로 민주노총이 제안하고 있는 최저임금인 77만6천원을 받는 일자리가 100만개가 창출되려면 일년에 10조원에 달하는 비용이 소요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자리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창출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지금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활동은 이러한 비용에 턱없이 모자라며, 설사 이러한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과연 최저임금으로 '가난한 노동자'의 굴레는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지극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어느덧 노동자의 의식속에 '그런 일자리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게 낫다'는 이데올로기와 '강요된 선택'의 메카니즘을 만들어 가는데에 기여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복지위기는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현실의 문제이다. 더욱이 문제는 이러한 실천과 연대는 사실 '연대'가 아니라, '불쌍한' 이들을 지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는 어찌보면 노동의 유연화, 공공서비스의 시장화 등을 통해 이윤추구의 자유로움과 극대화를 도모하는 자본의 전략의 둘러리를 서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 사회적 빈곤은 나눔과 연대의 아름다움 정신의 구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본의 전략 그 자체에서 파생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인'에 대해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수긍을 하면서, '결과'에 대해서만 서로 나누자는 것을 '고통은 나누면 줄어든다'는 미덕으로 여기기가 참으로 껄끄럽다.
* 노동자의힘 기관지 기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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