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선거를 여는 사람들의 총선이야기 Another0415
탄핵 논쟁,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독재(하)
사노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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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5월 24일 17시 36분 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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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논쟁,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독재(하)



목 차

1. 탄핵 정국과 정세
2.〈사노신〉의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기각하는 편향
3. 최원 씨의 국민 발의/ 소환제
4.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문제제기
(1) 최원씨의 인민 주권과 국가 주권의 아포리 - 최원 씨의 아포리
(2) 맑스 - 파리 꼬뮌과 독재권력, 당
(3)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와 독재
5. 최원 씨의 사변의/ 사변에 대한 공포와 노동자의 진실



4.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문제제기


⑴ 최원 씨의 인민 주권과 국가 주권의 아포리(7) -- 최원 씨의 아포리


최원 씨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지난 동구권의 경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나타났음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것의 근본적 원인이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를 해결하지 못한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는 “‘인민주권’(인민독재)과 ‘국가주권’(지도자 독재)간의 아포리”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제기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점을 보여주기 보다는 최원 씨의 정치적, 이론적 혼란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최원 씨의 글은 대단히 현학적이고 사변적이며 난해하다. 하지만 논의를 위해 그의 견해를 어느 정도 간추려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근대의 국가는 ‘인민주권’을 말했지만 그것은 ‘국가주권’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근대 국가는 ‘인민주권’과 ‘국가주권’의 양 극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변질됨으로써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증명했다.(8) 이것은 왜 그런가? (여기서 최원 씨는 독일 나치체제를 옹호한 파시스트 이론가 칼 슈미트의 이론을 끌어들인다.) 주권은 분할할 수 없으며 의지의 단일성에게 주권은 독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에 있어 주권은 인민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영토 장악(Landnahmen)’의 행위로 비롯된 국경에 근거한다. 즉 ‘국경의 독재(dictaorship of borders)’이다. 이것은 인민이 다양한 계급, 계층 등 다수의 분파로 나뉘어져 의지의 단일성이 실현될 수 없는 반면, 영토에 기반한 국가 그 자체는 의지의 단일성이 성립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최원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민 독재’라는 개념은 오로지 이러한 다면적 ‘인민’(데모스)을, 국경과 경계선들에 의해 표시되고 한정되는 또 다른 개념의 ‘인민’(에스노스)으로 환원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개념이다. 이러한 환원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 근대의 역사 전체는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우선 계급적대와 성적 차이가 그러한 인민적-주체적 ‘통합’의 불가능성을 표시하고, 지적 차이를 둘러싼 다면성(대중적 ‘의견들’의 “압축 불가능”하게 복수적인 측면 -- 스피노자)이 또 다른 쪽에서 그것의 불가능성을 표시한다.(최원, 「왜 ‘더 많은 민주주의’인가?」)


그렇다면, 최원 씨가 말하는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를 벗어던졌을 때 나오는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주권)의 해체이다. 그런데 최원 씨는 이러한 결론 앞에서 당황한다. 그리고는 여기서 앞선 모든 논의를 되돌린다. “자율주의자”들에 대해 모든 문제를 ‘비국가주의’쪽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국가일반’은 영원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분명히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로 주장했던 ‘국가주권’과 ‘인민주권’의 아포리를 “정치의 대상 그 자체를 이루는 하나의 영속적인 ‘문제’”라고 바꿔치기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민망한 듯 “이는 결국 ‘에스노스와 데모스가 오직 과정적이고 변증법적인 방식으로만 구별될 수 있으며, 데모스는 에스노스의 부정’이라는 말과 같은 말일 것이다”라고 부언한다.

그런데 최원 씨 “에스노스와 데모스가 오직 과정적이고 변증법적인 방식으로만 구별될 수 있”다면, 왜 “인민적-주체적 ‘통합’”은 불가능한가? “에스노스와 데모스가 오직 과정적이고 변증법적인 방식으로만 구별될 수 있”다면 ‘에스노스와 데모스’는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인민의 단일 의지가 불가능한가? 인민의 단일 의지가 가능하다면, 인민 주권은 허구이며 근대에 있어 주권은 오직 국가와 ‘국경의 독재’로만 성립 가능하다는 슈미트의 이론은 틀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은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의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최원 씨가 말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전략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 근거를 갖지 못하는 사변적 혼란이 아닌가?

최원 씨의 모든 주장은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다. 최원 씨는 근대 주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우선 스피노자를 끌어들여 “근대정치의 삼권분립은 ‘대중의/대중에 대한 공포’를 중화시키기”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몽테스키외가 스피노자의 제자였고 개인의 권력욕에 대해 허무주의적인 공포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정치의 삼권분립은 몽테스키외의 사변의 산물이 아니다. 몽테스키외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삼권분립은 당시 영국 정부 조직을 거의 그대로 묘사한 것이며 로크의 ‘이권분립론’의 영향력 하에 쓰여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영국의 권력분립은 대중에 대한, 대중의 공포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봉건적 절대 왕정과 부르주아적 의회의 투쟁과정의 산물이었다. 또한 몽테스키외는 그의 영국 친구로부터 군주적 · 귀족적 · 민주적 제 세력간의 상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이라는 생각(9)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보자. 로크는 자신의 이권분립론에서 주권을 분할한 적이 없으며 입법권(의회)이 주권자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로크의 시대,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맑스는 프랑스에서 1848년 혁명 이후, 관료적 행정기관에 국가권력이 집중되고 있음을 증언했다. 근대 역사에서 삼권분립이 (그 형태에서가 아니라 주권의 분할이라는 측면에서) 일정한 지속력을 갖고 유지됐던 적은 없다. 그리고 그 삼권분립 역시 ‘대중의/대중에 대한 공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절대왕정에서 부르주아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제계급세력간의 권력투쟁의 타협 형태로 발생한 것이다.

최원 씨의 사변성은 주권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주권의 소재를 다루는 문제와 민주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중의 다면성과 의사결정의 단일성, 지도자(당)와 대중 간의 모순을 뒤섞는다. 그가 “정치의 대상 그 자체를 이루는 하나의 영속적인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후자이다. 어떠한 정치체제, 어떠한 사회 제도에서도 대중(또는 인민)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그 보다 더 다양한 이데올로기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민들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다양한 사회적 제문제에 대해 특정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결정 방식을 민주주의로 하고 민주주의를 아무리 “영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강화시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 집단의 다른 집단에 대한 독재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아무리 개선한다고 할지라도 ‘다수결’을 의미하며 다수결이란 결국 다수에 대한 소수의 독재; 소수에게 다수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측면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적 제도를 개선하여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노력이 파리 꼬뮌이며 초기 소비에트공화국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최원 씨만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원 씨, (이제 남한까지 포함하여) 선진 자본주의국가는 자신의 정체를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의 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인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과 근로대중의 이해가 대변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법 앞에 평등’이라는 근본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민주적 제도가 부족해서 그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국가 체제에서 민주주의보다 앞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적 재산권의 보장이며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수호이다. 독립 전쟁을 통해 진보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을 건국했을 초기 매사추세츠 헌법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헌법이 법률에 선행하고 그 위에 존재하는 근본법으로서, 민주적인 다수결 원리의 위험으로부터 개인의 자연권, 특히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10)

실질적인 국가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따라서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가. 이러한 것을 주권의 소재라고 한다. 이 측면에서 인민 주권이란 허구이다. 근대 국가들은 스스로 인민 주권을 선언했지만, 그것은 차 떼고 포 뗀 상태에서의 인민 주권, 즉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한 모든 사전조치 위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허구라는 측면에서는 국가 주권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 세력에 기반하지 않고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는 지도자, 독재자, 군주는 없다. 어떠한 지도자든, 군주든 자신의 지지정치세력의 영향력 하에 움직였고 그것을 벗어날 때, 또는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못했을 때에는 제거됐다. 이것을 매킬웨인이라는 학자는 “군주는 독재자(autocrat)이긴 하지만, 전제자(despot)는 아니었다”고 표현했다. 군주의 의사는 법률의 효력을 가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그 의사가 일정한 방법으로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표명되었을 때에 한한다. 요컨대, 군주는 ‘신의 법’ 또는 ‘자연의 법’이라고 표현되는 것의 구속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신의 법’은 당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였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중세에도 ‘충성의 철회’라는 불복종 운동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됐다. 최원 씨가 슈미트가 친화력을 갖는다고 말하는 보댕과 홉스 역시 절대군주제를 주장했지만, 그 군주제는 특정한 조건 하에 제약된 것이었다. 보댕은 주권이 군주에게 있다고 말했지만, 주권이 하느님의 법과 자연법에 구속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대로부터의 관습에 입각한 통치법(leges imperii)이라는 것이 따로 있으며 주권은 거기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것을 유린할 때 주권은 소멸된다고 주장했다. 슈미트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독일 ‘국가법인설’은 루소의 인민 주권론이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정치적 상황 --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음으로 인해, 군주 주권을 주장하기도 그렇다고 인민 주권을 주장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관념일 뿐이다. 주권은 특정 계급, 또는 계급연합에 있다.

따라서 맑스, 레닌은 ‘계급 주권’을 주장했으며 ‘인민 주권’이라는 근대 부르주아지들의 허위 관념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권은 부르주아지들에게 있다. 부르주아 국가권력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고 있다. 따라서 노동해방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근로대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 그 국가를 (부르주아 독재에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한다. 이것이 맑스, 레닌의 주장이다.

⑵ 맑스 -- 파리 꼬뮌과 독재권력, 당(11)

최원 씨는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정식화하는 데 있어서 ‘혁명당’의 문제로 곤란을 겪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마르크스가 ‘코뮌’을 분석하고 있을 때, ‘혁명당’에 대한 완전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맑스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직접 민주주의’로 가는 정치형태 상의 이행”이며 “노동계급의 대중적 조직들의 ‘실존’에 기초”하는데 “당은 정확히 그것의 ‘예외’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당이 대중조직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관련하여 겪는 곤란이란 무엇인가? 또한 당이 무엇의 ‘예외’라는 말인가?

당과 대중조직은 ‘규약적으로’ 독립적이다. 하지만 당은 ‘정치적으로’ 대중조직을 지도하고 대중조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조직이 ‘규약적으로’ 독립적이라는 것은 의사결정에서의 자주성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의 대중조직으로서 꼬뮌은 자주적인 의사결정을 할 것이며 그것은 구성원들의 직접 민주주의에 의거할 것이다. 그런데 당은 꼬뮌의 의사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꼬뮌의 자주적인 의사결정과정에 개입하여 그것을 변질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선전과 선동, 당원들을 통한 프락션 활동을 통해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아무런 ‘곤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최원 씨는 인민은 다면적이라고 말했다. 다면적인 인민이 자기 분파의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대중조직과 별도의 모임을 구성하거나 그 모임을 통해 대중조직의 의사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곤란한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것이다. 맑스가 이러한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고, 꼬리를 말면서 “완전한 침묵”으로 답을 회피했다는 것은 맑스를 바보 취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맑스는 왜 ‘파리 꼬뮌’을 분석하는 논문에서 당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최원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심오하지 않다. 파리 꼬뮌에서 혁명정당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기에 파리에서 제1인터내셔널 파리지부의 발의로 약 5백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각 지구마다 ‘감시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 기반하여 ‘20구 중앙위원회’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 ‘20구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당’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감시위원회’를 “그 성격이 완전히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아닌 모든 사람을 배제하고 즉시 재건에 착수”하는 방향으로 당을 건설하려던 이 시도는 실패했으며 엥겔스가 「『프랑스에서의 내전』독일어 제3판 서설」에서 서술한 것처럼, 사회주의 제 분파들은 파리 꼬뮌 기간동안에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것이 맑스가 『프랑스에서의 내전』에서 당을 언급하지 못한 이유이다. 혁명의 경험을 평가하는 글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파리 꼬뮌과 관련하여 ‘당’에 대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리 꼬뮌 이후 제1 인터내셔널의 ‘런던협의회’와 ‘헤이그 대회’에서 파리 꼬뮌에 대한 평가를 놓고 맑스 파와 바쿠닌 파는 대립했다. 맑스 파는 꼬뮌이 수립된 원인은 노동자가 ‘정치활동’에 눈을 떴기 때문이며 좌절의 원인은 ‘정치조직의 결여’라고 말하였다(롱게). 이에 반해 바쿠닌 파는 정치활동을 거부했기 때문에 꼬뮌이 형성될 수 있었으며 지도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맑스가 파리 꼬뮌의 좌절로부터 끌어낸 최대의 실천적 교훈은 노동자 계급에 있어서의 전위조직 즉 ‘당’의 결여라는 문제였기 때문에 바쿠닌 파와의 분열을 각오하고 제1 인터내셔널을 런던의 총평의회를 지도부로 하는 강고한 조직으로 재편성하고자 했다.(12)

최원 씨는 파리 꼬뮌을 단지 ‘직접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이행으로만 해석하며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측면에서 최원 씨는 맑스의 곤란과 침묵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해체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제출하는 자신이 맑스의 곤란에 해답을, 침묵에 자유를 줄 수 있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 꼬뮌의 혁명 투사들과 맑스는 최원 씨가 믿고 싶어하는 그러한 곤란을 전혀 겪지 않았으며 ‘더 많은 민주주의’의 환상으로 시달리지 않았다. 앞서 말한 ‘20구 중앙위원회’의 대표단은 자신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당의 강령에 해당하는 「원칙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모든 가능한 수단에 의거하여 부르주아의 특권의 폐지, 세습적 계급제도의 폐지, 노동자의 정치의식의 앙양, 한 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고 획득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고용자 계급도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계급 그 자체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사회적 구성의 유일한 기초로서 인정한다. …… 정치적 영역에서는 공화제를 다수결 원리보다도 우선시한다. 그 이유는 다수자가 국민투표라는 직접 수단에 의거하든지, 그들의 도구인 의회라는 간접 수단에 의거하든지 인민주권의 원칙을 부정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사회구성의 기초가 정치적 · 사회적인 혁명적 청산에 의하여 변혁되기까지는 필요하다면 모든 헌법제정의회와 자칭 국민의회 소집에 모든 힘을 기울여 반대할 것이다. 이러한 결정적 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 시의 혁명적 사회주의집단의 대표로 구성되는 혁명적 콤뮨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시의 정부로서 인정될 수 없다.(13)


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리의 혁명 투사들보다 더 나아갔다. 맑스는 ‘중앙위원회’가 빠르게 내전을 개시해야 할 상황에서, “찬탈적인 권력이라는 외양이 자신들에게 붙”는 것에 대한 ““고결한” 가책”으로 꼬뮌 선거로 시간을 낭비한 것을, 파리 꼬뮌의 패배의 원인으로 들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가 자신들의 ‘임시적이고 혁명적인’ 권력을 내전의 종료시까지 유지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원 씨가 맑스와 레닌을 대립시키기 원하는 것과 달리 러시아 혁명기 레닌의 모든 정책은, 이미 맑스가 지시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이 좋다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비느와가, 그 다음에는 빠리 국민 방위대의 반동적인 부분이 자진하여 퇴각한 직후에 곧장 베르사이유로 행군했어야 했습니다. 좋은 순간을 놓친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짓궂은 난쟁이 띠에르가 빠리의 무장을 해제하려는 시도로 이미 내전을 개시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사람들은 내전을 개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두 번째 오류: 중앙 위원회는 자신의 권력을 너무 일찍 포기하고 꼬뮌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다시 너무 “고결한” 가책 때문이었습니다!(14)


파리 꼬뮌의 혁명 투사들, 맑스, 레닌은 국가 권력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노동해방과 계급 해방을 위해 그 권력은 필요하다면 혁명적 독재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역시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혁명을 대신할 수 없으며 유아적인 ‘더 많은 민주주의’ 놀음은 반혁명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현 국가권력의 주인인 부르주아지들 역시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이것을 모르고 혼란을 겪는 것은 학자연하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밖에 없다.

⑶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와 독재

보통 파업에는 혁명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의 대중파업, 특히 공장점거 파업은 노동자들의 혁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최원 씨, 파업 시기 노동자들은 아주 일상적으로 참정권의 제한과 독재를 수행한다. 여기에 대해 어떠한 사변도 늘어놓지 않는다. 파업 시기,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관리자들을 쫓아낸다. 그들에게 의결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노동자의 의결권을 박탈한다. 쟁대위로 권력이 집중된다. 중앙집중화된다. 이러한 것들 없이 파업이 사수되고 투쟁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노동자들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이 민주주의 원리를 배반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의심을 조금도 갖지 않는다. 백골단과 구사대를 앞에 두고 ‘더 많은 민주주의’ 제도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제도의 마련 없이도 대중 집회와 토론을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한다. 이것이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독재이다. 노동자들은 이것의 양면적, 이중성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별한 제도 없이 노동자들의 독재와 민주주의는 융합되고 실현된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그렇다면, 구사회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변질됐는가? 그것은 ‘인민주권’(인민 독재)과 ‘국가주권’(지도자 독재)가의 아포리의 산물이 아닌가?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민 발의/ 소환권’ 같은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국민 발의/ 소환권’이 살아 있는 남한의 민주노조를 보자.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는 건설됐으며 직접 민주주의의 전통이 아직 살아있다. 그런데 남한의 대공장 민주노조는 조합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는가? 탁학수 집행부가 장악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어용노조에도 조합원 총회, 총회에서의 조합원 발의권, 소환권은 있다. 그렇다면, 탁학수 어용 노조는 ‘더 많은 민주주의’ 제도가 있음으로 해서 조합원들의 노조인가?

올 1월 기아자동차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압하는 어용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 투쟁이 있었다. 집행부에 대한 소환 발의가 있었으며 조합원 총회에서 불신임(소환) 투표가 행해졌다. 그런데 결과는 불신임의 기각이었으며 기아자동차 노조는 ‘조합원들에 대한 독재’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최원 씨, 이것은 왜인가? 조합원 주권과 위원장 주권 간의 아포리인가? 조합원들 역시 다면적이다. 따라서 의지의 단일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위원장 주권이 발생하는 것인가? 최원 씨의 해결책은 노조의 해체인가, 아니면 발의/ 소환권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적 제도인가? 남한의 민주노조에는 직접 민주주의가 부족한가? 남한 민주노조에는 직접 민주주의의가 부족하기 보다는 있던 민주주의가 사멸되고 있지는 않는가?

남한의 민주노조는 관료주의화되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민주노조의 직접 민주주의 전통은 해체될 것이다. 그러나 남한 민주노조의 변질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결여나 “근대 주권 개념의 아포리”에 있지 않다. ‘전노협’으로 대변되는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파괴,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실리주의적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의 의도적 지원과 성장, 신경영전략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현장권력 탈환 전략, 여기에 대한 노동운동의 무능력, 몇 차례에 거친 구조조정과 실업의 위협,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시로 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투쟁에서의 패배, 민주노총의 합법화과정 등 복합적 요소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노동자 대중의 능동성을 해체시켰으며 협조주의적인 관료집단을 형성시켰다. 그리고 이것들의 결과가 노동조합을 조합원들의 대립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결코 “근대 주권 개념의 아포리”라는 사변의 산물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전화하는 과정은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 혁명 러시아의 고립, 경제적 미발전, 내전기간 선진노동자들의 죽음과 해체, 다수 소부르주아층의 영향력, 당의 오류와 변질 등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인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5. 최원 씨의 ‘사변의/ 사변에 대한 공포’와 노동자들의 진실

최원 씨는 「사노신」을 비판하는 글에서 “근본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왜 더 이상 우리 투쟁의 목표가 될 수 없는지를 해명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최원 씨의 ‘사변의/ 사변에 대한 공포’를 입증해 보였을 뿐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 좋다. 최원 씨뿐만 아니라 우리도 ‘민주주의’를 원한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인민이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다면적인 인민을 ‘통합’시키기 위해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근본 원리로 한다. 민주주의는 소수에게 다수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제도를 아무리 많이 늘리고 확장시킨다고 할지라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인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가? 이 세상은 왜 노동자들이 아니라 소수 자본가들에게 지배되고 있는가? ‘더 많은 민주주의’가 이 불합리한 세상을 전복시켜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적 재산권과 임금노예제 유지라는 전제 하에서 적용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계를 부수지 않는 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 ‘더 많은 민주주의’는 누구의 민주주의인가?

우리는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원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동자의 독재 역시 원한다. 우리는 자본가들이 공장에서 ‘노사 한가족’이라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노사 한가족 선언’을 믿지 않는 것처럼 인민주권을 믿지 않았다. 현재 공장의 주권은 자본가에게 있으며 국가의 주권은 자본가들에게 있다. 그리고 ‘근로자 참가법’과 ‘노사협의회’의 확장이 노동자의 처지와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키라고 믿지 않는다.

공장을 노동자들이 직접 관리할 수 있을 때,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의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것처럼 이 사회를 노동자들이 직접 관리할 수 있을 때, 노동자들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의 민주주의인가가 전제되지 않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파업을 사수하기 위해 무장과 독재가 필요한 것처럼, 노동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무장된 힘과 노동계급의 독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것이 노동자들의 진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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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포리는 그리이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이라는 말에서 나온 철학용어로 사물에 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한다.

(8) “결국 당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제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나타났던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근대 주권개념의 아포리 -- ‘인민주권’(인민독재)과 ‘국가주권’(지도자 독재) 간의 아포리 -- 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최원, 「왜 ‘더 많은 민주주의’인가?」)

(9) “우리의 자유로운 정부조직이 이와 같이 오랫동안 손상되지 않고 유지되어왔던 것은, 한 체제 속에 함께 뒤섞인 군주적 · 귀족적 · 민주적 제세력의 혼합과 또 이 세 신분의 상호 균형에 해서이다.”(볼링브로크, 조지 세이빈·토머스 솔슨의 『정치사상사』에서 재인용)

(10)「헌법제정권력이론의 역사적 고찰」

(11) 최원 씨, 맑스 · 레닌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슈미트를 읽기 전에 (발리바르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그들의 저작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최소한 맑스와 슈미트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최원 씨의 주장에 문제가 심각함은 “분명하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12) 柴田三千雄, 『파리콤뮨』

(13) 柴田三千雄, 『파리콤뮨』에서 재인용

(14) 「맑스가 하노버의 루트비히 쿠겔만에게(1871년4월12일,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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