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계급 독재에 대한 최원 씨의 비판에 대한 비판 -
현종혁
[사회주의노동자신문] 창간준비 3호에 실렸던 특집기사를 보고 뉴욕에서 유학 중인 최원 씨가 사노신 홈페이지에 〈왜 더 많은 민주주의인가?--사노신의 비판에 답하여〉를 올렸다. 이어 사노신 독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현종혁(h2h2@naver.com) 씨가 최원 씨의 글을 비판하는 글을 메일로 보내왔다. 때가 좀 늦긴 했지만 탄핵 사태로 인해 벌어진 민주주의 논쟁의 진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이라 판단한다. [사/노/신](준)
목 차
1. 탄핵 정국과 정세
2. 〈사노신〉의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기각하는 편향
3. 최원 씨의 국민 발의/ 소환제
4.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문제제기
(1) 최원씨의 인민 주권과 국가 주권의 아포리 - 최원 씨의 아포리
(2) 맑스 - 파리 꼬뮌과 독재권력, 당
(3)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와 독재
5. 최원 씨의 사변의/ 사변에 대한 공포와 노동자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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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발생한 대통령 탄핵 사태를 둘러싸고 노동운동 내에서는 다양한 고민과 입장들이 제기됐다. 열사정신 계승과 노동운동 탄압 분쇄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 모두가 그랬겠지만 탄핵이 발표되던 날, 필자의 가슴은 덜컹 내려 앉았다. 필자가 느꼈던 느낌은 먹고 살기 위해 노점상을 차리고 목이 쉬도록 손님을 부르고 있는데 저쪽 대형백화점에서 대형 엠프와 이벤트 도우미들을 동원하여 서민들을 위해 가격의 거품을 빼자며 대규모 바겐세일에 들어갔을 때, 그래서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가판대를 떠나 백화점으로 행하는 것을 지켜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예감대로 탄핵은 대중과 여론, 운동 세력의 관심과 행보를 열사의 주검과 투쟁의 현장에서 여의도와 광화문으로 옮겨 놓았다.
필자는 다수 대중과 노동운동권이 탄핵 사태에 말려들어 탄핵 반대, 민중 탄핵, 제헌의회 논란, 국민 소환/ 발의제 등 탄핵과 관련된 다양한 입장을 제기하는 혼란 속에서 ‘노동운동 탄압 분쇄/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철폐’라는 투쟁전선을 사수할 것을 제기한 〈사노신〉의 입장과 정세 인식을 기본적으로 지지한다. 유사한 입장을 제기한 〈현노신〉의 말대로 ‘투쟁하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정세는 2002년 하반기이후 강화되고 있는 자본의 중소 사업장과 하청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대공장에서 민주노조 와해 공작, 무수한 부당노동행위들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노신〉과 〈현노신〉은 기본 전선과 태도를 밝히고 사수하는데 올바르게 기여했지만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전술에서는 부분적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탄핵 국면에 대한 기권과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부정이다. 필자는 〈사노신〉을 즐겨 보는 독자이자, 노동운동의 현실 속에 함께 하는 동지로서 이 부분에 대한 견해를 제출하고자 한다. 또한 〈사노신〉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식을 통해 ‘노동자 권력’ 사상을 폐기하고자 나선 최원 씨의 정치에 대한 비판도 제출한다.
1. 탄핵 정국과 정세
필자는 기본적으로 〈사노신〉의 정세 인식에 동의한다. 대통령 탄핵 사태는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가 권력의 위기가 아니라 단지 노무현 정권의 위기였을 뿐이었다. 탄핵 사건의 배후 기획자였던 황태연 교수와 〈시사저널〉의 인터뷰가 보여주는 것처럼, 탄핵의 기획자들은 탄핵이 경제의 혼란과 행정의 공백으로 이어지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해외평가기관과 투자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탄핵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주아 세력들의 분열과 갈등은 체제의 위기 속에서, 그 위기의 해결방안을 놓고 보이는 분열과 갈등이 아니었다. 오히려 체제의 안정, 피지배계급의 저항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진, 편안하게 허리띠를 풀어놓고 벌인 밥그릇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밥그릇 싸움에 부르주아 한 분파가 노동자와 근로대중을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동원한 것이다. 또한 노사모나 국민의 힘과 같이 탄핵 반대 투쟁을 주도한 세력들은 이 투쟁의 물결이 조금이라도 체제의 울타리 밖으로 넘쳐 날까봐 신경을 썼으며 한 방울도 넘쳐나지 않게 성공시켰다.
필자는 여기서 노동계급에게 있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별반 차이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무현정권이 노동운동을 얼마나 탄압했는가를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사노신〉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은 기본적으로 정치정강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 이회창의 선거공약이 보여주듯이, 경제 · 대북 · 노동 등 주요 정책에서 양 당간의 정책적 차이는 거의 없다. 한나라당이 보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파시즘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이회창이 집권했다면, 또는 이른바 탄핵 쿠테타가 성공했다면 한나라당을 제외한 여타 정당과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배타적인 권력독점을 향한 정책을 추진했을까? 민주노총과 노동조합을 불법화시키고 다시 캠퍼스에 전경을 주둔시켰을까? 이것은 비현실적인 몽상이다.
1987년 이후 부르주아들은 극우와 극좌를 배제한 자유주의 체제를 추구해 왔으며 90년대 초반이후 확립됐다. 88년 김용갑과 양동만의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 하는 ‘극우 궐기론’을 전후로 하여 극우 세력은 권력 밖으로 배제되어왔다. 현재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극우 세력은 권력 밖에서 소규모 사회 운동으로 자신들을 재구축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91년 노태우 중간평가와 강경대 열사 사건을 둘러싼 투쟁 국면에서 김대중이 군부 쿠테타설로 대중의 좌익화를 막으려 했을 때를 제외하고 파시즘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군부 쿠테타 음모의 주역 ‘하나회’마저 김영삼 정권기에 청산됐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 패배이후, 대선 패배의 원인을 당의 보수성과 노후화로 평가하고 최병렬 체제 하에서 초·재선 의원들과의 연대를 통해 당의 개혁과 인적 청산을 추진해왔었다. 이 과정이 성공적으로 종료됐다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회창 체제에 비해 조금 더 왼쪽으로 -- 합리적 보수라는 기치 하에 -- 이동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또한 운동의 현재적 상태는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에 노동자계급이 직접 뛰어들 수 있는 주객관적인 제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와 의식화 정도, 혁명 정당의 미형성, 혁명적 정세의 부재 -- 오히려 대중투쟁의 침체기이다.(1)
이 같은 상황에서 모든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권력투쟁 방안을 제출하는데 욱 하여 ‘민중 탄핵’과 같은 즉자적인 권력투쟁 방안을 제출하거나 시대를 15년 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반파시즘 민중전선’을 제출하는 것은 정세를 계급제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르주아 정치정세에 매몰되어 나타나는 증세이다. 현재의 시기는 권력 투쟁을 위해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준비시키는 시기이지 부르주아지들의 권력 투쟁에 동하여 어떠한 권력 주체의 형성도 없이 권력 투쟁의 선언만 일삼을 시기가 아니다.
2. 〈사노신〉의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기각하는 편향
탄핵 사태는 기본적으로 자본가들 간의 권력 다툼이었으며 그것이 누구의 승리로 귀결되던 자본가들의 노동·경제 정책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탄핵 반대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커튼을 내리고 대중의 시각에서 가려버린 역할을 했다. 여기에 대해 노동운동가들은 탄핵 국면 속에 ‘노운탄 분쇄/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철폐’ 전선이 완전히 해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했었어야 했다. 이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로부터 〈사노신〉과 〈현노신〉은 지나치게 나아갔다.
우선 〈사노신〉과 〈현노신〉은 탄핵 사태와 촛불시위에 대해 기권을 제기했다.(2) 그러나 기권은 두 가지 점에서 올바르지 않다. 첫째, 동지들의 우려와 무관하게 이미 탄핵 사태는 발발과 함께 대중의 관심을 열사 투쟁에서 옮겨놓았다. 즉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노력 여부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이 ‘탄핵 정국에 대한 대응’에 빠져버린 것은 변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었다. 탄핵 정국은 강한 힘을 가진 객관 현실이며 그것을 단순히 비정세적 교란 행위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만약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힘으로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우리는 ‘탄핵 정국에 대한 대응’과 총선에 대립하여 현장으로부터 형성된 대중투쟁을 미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대중투쟁이 혁명적으로 고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현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그럼으로 인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더욱 고립을 강요당하고 현재 투쟁의 요구와 쟁점들은 파묻혀” 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탄핵 정국과 촛불시위에 대한 기권은 투쟁 현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립을 강화시킨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강요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도 최대한 탄핵 정국과 촛불시위에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개입했어야 했다. 둘째, 탄핵 정국과 촛불시위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사노신〉이 말한 것처럼, 다수의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민주수호 탄핵 반대’를 외치며 열우당의 이중대로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탄핵 정국과 촛불시위에 대한 기권은 다수 노동자들에게 대한 포기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의식을 그것 그대로, 부르주아지의 영향력 아래 내버려 두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수 노동자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의식과 투쟁하기 위해서도 탄핵 정국과 촛불 시위에 개입했어야 했다.
그런데 탄핵 사태와 관련된 입장에서 〈사노신〉은 보다 더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었다. 〈사노신〉은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사노신〉은 정당하게 “민주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계급독재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자권력으로 가는 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최대치에 결코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권력을 민주주의 투쟁과 분리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사노신〉의 주장과 반대로 민주주의 투쟁을 강화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과 결합된다. 필요하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그 최대치로 밀어붙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투쟁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강화될 수 있다. 현재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기각하는 듯한 주장은 대단히 위험하다. 또한 극도로 왜곡된 노동자주의, 노동조합주의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관점을 제한하고 변질시킨다. 현장에서 보면, 이제 막 투쟁에 뛰어든 신참 노동자들의 의식이 (누구든지 그의 전투적 도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참 전투파보다 정치적인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활동가들의 의식이 국민파의 사회개혁투쟁이라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염증 때문에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라는 반편향에 오래 물든 결과이다.
작년 열사 투쟁과 올해 박일수 투쟁의 요구; 노동운동 탄압 분쇄와 비정규직 철폐, 하청 노조의 현장활동권 보장은 엄밀하게 말해 모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이다. ‘로드맵’에 맞서 파업권을 강화하는 투쟁 요구들을 제시할 때, 자본가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처벌과 근로기준법 강화를 요구할 때, 정리해고제도와 파견근로제의 철폐를 요구할 때 --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들이며 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요구들이다. 이것은 반체제적이거나 그 자체로 혁명적인 요구안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현장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 투쟁을 수행하고 있다. 결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노동자권력을 대치시키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물론 역설적으로 전투파 활동가들의 적지 않은 수가 ‘현장 투쟁’이라는 이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혁명적 요구로 생각하면서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비정규직 완전 철폐와 같은 투쟁요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이지만 현체제 하에서는 (극도의 위기 상황과 같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현되기 어려우며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완결될 수 있다. 또한 비정규직 철폐 투쟁은 노동자들의 의식과 투쟁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강화한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로부터 비롯되는 이러한 민주주의 투쟁들을 다른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과 구별시키는 것은 이것들이 노동자들을 육체적 · 정신적으로 보호하고 그들의 직접 행동과 맞물려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강화시킨다는데 있다. 이러한 투쟁 요구들은 혁명정당의 최소강령으로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은 다른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로서의 일관성과 보편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현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 실질적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가진 자들만을 위한 민주주의로 기능하고 있다. 탄핵 정국에서 헌법재판소는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활동을 위헌이라고 결정 내렸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일관된 적용이 노동자들의 집 문앞에서 멈춰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남한 민주주의 체제는 더욱 안정화되고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한 서구 정치학자가 신자유주의 전략에 대해 ‘두 국민 프로젝트’라고 말했던 것처럼, 민주주의의 축복을 누리는 경계선은 나날이 선명해질 것이다.
‘노운탄 분쇄/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철폐’ 투쟁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 않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지 않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자들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이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철학적으로, 헌법학적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적인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진보성을 상실했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누구의 민주주의인가이다. 노동자계급의, 노동자계급을 위한 민주주의를 재구성해내야 한다.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피착취 근로대중의 민주주의로 기능할 것이며 우리의 투쟁요구는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본주의 체제의 안팎을 유연하게 넘나들게 해야 할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탄핵 정국에 개입했어야 하는가? 필자는 개입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운탄 분쇄/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요구를 가지고 탄핵 정국에 개입했어야 했다. 탄핵 반대, 민주주의 수호 투쟁에 개입하여 국회의사당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피땀을 흘려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민주주의 역시 수호되어야 함을 제기했어야 했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생각으로 촛불시위에 참여한 다수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가 투쟁하는 노동조합과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선동했어야 했다. 공무원과 교사노조의 정치활동금지가 합헌으로 판정되던 상황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의 한계를 설명하고 민주주의가 확장되어야 함을 선동했어야 했다. 로드맵 분쇄와 ‘노운탄 분쇄/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철폐’의 제요구들을 확장되어야 할 민주주의로 제시했어야 했다.
“노동자에게도 민주주의를!!” “노동운동 탄압 중단, 하청 노조 활동 보장, 부당노동행위 처벌, 비정규직 철폐, 파업권 보장” -- 이것이 탄핵 정국에서 우리의 슬로건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슬로건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첫째는 탄핵 정국과 현장으로부터의 투쟁을 연결하고 탄핵 정국에서 노운탄 전선을 사수하는 역할. 둘째는 탄핵에 따른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의 민주주의 놀음에 담즙과 쓴물을 끼얹는 것.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다수 노동자들의 의식과 투쟁하고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 의회는 그 내부에서부터만 파괴될 수 있다던 한 혁명가의 말을 기억하자. 이러한 개입은 노운탄 전선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이 슬로건은 계급적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부르주아지들의 탄핵 정국을 노운탄 정세에 포섭시킴을 의미한다.
3. 최원 씨의 국민 발의/ 소환제
최원 씨는 탄핵 정국에서 ‘국민 발의/ 소환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필자는 ‘국민 발의/ 소환제’를 반대하지 않는다. 만약 ‘국민 발의/ 소환제’가 있다면 없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그 측면에서 ‘국민 발의/ 소환제’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최원 씨의 그것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최원 씨는 ‘국민 발의/ 소환제’를 특정한 전략적 관점에서 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원 씨는 “‘계급투쟁이란 착취의 제도들(국가장치들)을 쟁점으로 한 끝없는 투쟁’”이라고 새롭게 규정하고 국가장치를 개선하는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국가의 재구조화”(3) 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측면에서 최원 씨의 노선에 대해 유로꼬뮤니즘의 오류의 반복이라는 〈사노신〉의 비판은 정당하다.
최원 씨는 “나는 심지어 ‘계급투쟁이 제도들(국가장치들)을 관통한다는 말조차 거부한다. 계급투쟁은 제도들을 관통하지 않고 언제나 제도들 속에서만 벌어진다. 계급투쟁은 제도들 바깥의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장소를 찾을 수 없으며, 그 형이상적 실체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최원 씨는 계급투쟁을 경험해 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아니고서야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할 수 없다. 대중투쟁은 자신의 요구를 갖는다. 그러나 그 요구가 반드시 제도의 형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최저임금제만 계급투쟁이고 생활임금 쟁취나 임금 인상 또는 임금 인하 저지 투쟁은 계층투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IMF 경제위기 때 노동자들의 “경제 파탄 책임자 처벌” 요구투쟁은 대중들의 무정부적 발광이고 “경제 파탄 책임자 처벌을 위한 국민 재판소 설치”라고 했을 때 계급투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원 씨의 주장과 달리 제도 투쟁은 계급 투쟁의 하나의 형태이며 계기에 불과하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계급투쟁은 다양한 성격과 형식으로 터져나온다. 또한 그들의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계기와 매개 역시 제도 투쟁 그 하나로 제한되지 않는다.
최원 씨는 “우리도 혁명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중의 혁명적 행동은 혁명의 법적 제도화보다 앞선다는 것, 혁명적 시기 대중 행동은 법과 제도로 제약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는가 여부야 말로 혁명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진실로 혁명을 원하는가 아닌가를 나눈다. 혁명적 시기 대중의 행동은 포고령, 법령에 앞선다. 즉 제도의 선포나 형성에 앞선다.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노동자권력으로의 국유화를 선언하기 전에 스스로 공장을 몰수한다. 또한 노동자평의회에 관한 제도적 법령을 선포하기 전에 이미 점거 파업 현장에서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공장을 관리해 들어간다. 혁명적 시기, 제도와 법은 대중의 행동을 정식화하고 공식화한다. 노동자들이 어떠한 제도적 형태도 없이 스스로 공장을 몰수하고 관리해 들어갈 때, 그것은 저급한 대중폭동이고 공장평의회 제도 발의를 위한 서명용지에 사인할 때 그 때에서야 계급투쟁이 되는 것인가?
최원 씨의 주장은 본인이 의도했는가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제도 개선 투쟁으로 한정하고 있다. “언제나 제도들 속에서만 벌어”져야 할 계급투쟁이 “제도들” 밖에서 벌어질 때, 최원 씨에게 그것은 천박한 노동자주의이거나 무정부주의적 혼란이다. 물론 최원 씨는 “제도는, 그렇다, 제도일 뿐이다. 제도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한다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신화다. …… 대중들의 능동화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여기까지 나는 인정할 수 있다”(4)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국민 소환제가 극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권력 장악으로 나간 사례가 제시되면서.(5) 그러나 “ …… 국민발의권 투쟁을 조직했던 그 어떤 사람들도 이 제도의 도입이 곧 진보를 의미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최원 씨는 “착취는 그것을 조직하는 그 모든 제도들의 총괄적 효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해 최원 씨에게는 “정치투쟁은 그 자체 제도들 속에서 펼쳐지는 제도들에 투쟁”인 것이다. 따라서 최원 씨의 정치에서는 국민 발의권의 도입 그 자체를 진보라고 할 수 없을지는 모르나 그러한 제도들의 도입 과정, 제도들의 혁신과정은 진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원 씨, 솔직해지자. 당신은 인민뿐만 아니라 계급 자체를 해체시키고 있다.(6) 계급이라는 주체가 없는 계급투쟁이란 있을 수 없다. 계급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최원 씨가 계급투쟁 운운하는 것은 넌센스다. 최원 씨, 당신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당신이 말하는 제도 투쟁이란 인민투쟁도, 계급투쟁도 아닌 그냥 민주화 투쟁 -- 좋게 말해,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일 뿐이다. 그렇지 않는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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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원 씨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필자가 보았을 때 〈사노신〉은 노동자 권력의 문제를 선전의 과제로 제기했지 당면한 투쟁의 과제, 전술 과제로 제출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기사의 제목만 대충 보고 저질러진 실수인 듯하다. 그러나 글을 읽어보면 여기에 답은 금방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는 부르주아 정치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 속에서만 그 싹이 형성될 수 있다. 진정으로 새로운 정치는 자본주의 국가장치를 분쇄하고 그것을 대체할 노동자권력에 있기 때문이다. …… 탄핵사태로 빚어진 일시적인 민주주의 전선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진정한 대안은 노동자권력에 있음을 선전하는 것, 그리고 현재의 계급투쟁 전선을 강화하는 것에 있다.”(이태영, 「탄핵반대 민주수호가 아니라 자본주의반대 노동자권력으로」, 『사회주의노동자신문』준비3호)
최원 씨, 다른 사람의 글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읽고 정확히 비판하는 습관을 길러주시길 바랍니다.
(2) "선진노동자의 임무는 민주주의 운동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다. 개별화되고 있는 이러한 투쟁들을 강화하고 전 계급적 전선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대중 속으로 계급의 슬로건을 보급하는 것이 선진노동자와 사회주의자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이태영, 「탄핵반대 민주수호가 아니라 자본주의반대 노동자권력으로」)
“‘탄핵 정국에 대한 대응’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이 내리는 전술 지침이나 노동대중을 향한 선전선동이 오히려 노동자 투쟁을 고립시키고 파괴하는데 일조함으로써 그들이 바라는 대중투쟁의 진출이나 ‘진보정치 실현’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 현재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정세의 중심무대로 올려놓고 정세의 주도력을 쥐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층운동 제세력의 기회주의 전술들이 뿜어대는 교란 효과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정세인식과 전술적 중심고리를 틀어쥐고 단호히 나아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현장노동자신문, 「탄핵정국과 04년 계급투쟁」)
(3) 최원, 「새로운 계급투쟁을 향하여(2004-04-05)」
(4) 최원, 「왜 ‘더 많은 민주주의’인가?」
(5) 「남구현, 이해영, 최형익 (2004년 3월 23일)」
(6) "이러한 정치형태에 여전히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는가? 우선 우리는 더 이상 ‘계급모순’만을 말하고 있을 수도 없거니와, 더 나아가서 계급을 하나의 동일성으로 사고하지 않기 위해서, 즉 계급을 하나의 주체로 사고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름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는 점을 시인할 필요가 있다.”(최원, 「왜 ‘더 많은 민주주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