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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우리가 영국과 아메리카의 운동에 관한 엥겔스의 견해를 독일의 운동에 관한 그의 견해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생각이 독자에게 훨씬 더 분명하게 될 것이"라며, "이 모든 견해들을 주홍실처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 노동자당의 [우익]에 대한 경고,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에 대한 무자비한(때로는 - 1887-79년에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 격노한) 전쟁."이라고 한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라살레주의자들 및 듀링과 타협한 것에 관해 불평하면서(1877년 10월 19일 편지), 맑스는 [사회주의에 '보다 높고 이상적인' 지향을 부여하기를 원하는,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유물론적 기초(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누구에게나 진지한 객관적 연구를 요구하는)를 정의, 자유, 평등, 우애의 여신들을 갖는 현대적 신화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미숙한 학생들 및 최고로 영리한 국가자격 박사<독일어로 [박사]는 [학위취득 희망자] 또는 [1급 대학 졸업자]에 상응하는 학위이다> 도당과의 타협도 마찬가지로 비난한다. "[『추쿤프트』를 발행하고 있는 회흐베르크 박사는 이경향의 대표자로서, 당의로 '밀고'들어왔다.-나는 그가 '가장 고상한' 의도로 그랬을 것이라고 가정하지남 나는 '의도'에 대해 저주하지는 않는다. '온건한 가정'을 가진, 그의 『추쿤프트』강령보다 더 비참한 어떤 것도 햇빛을 거의 보지 못했다.](편지 70호)"(같은 글, p.428)
"거의 2년 뒤에 …반사회주의 법률 이후에, 당은 즉시 올바른 길을 찾아내지는 못했고, 처음에는 모스트의 무정부주의와 회흐베르크 일당의 기회주의 쪽으로 흔들렸다. 맑스는 후자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이론에서는 무실체이고 실천에서는 무용지물인 이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특히 사회민주당의 이빨(그들이 대학식 처방에 따라 고정시켰던 것)을 뽑으려고 하며, 자신들의 혼란되고 설익은 지식에서 추출한 '교육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계몽하려고, 또는 그들이 쓰는 말에 따르면, 노동자들을 물들이려고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을 쁘띠부르조아지의 눈에 존경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한다. 그들은 단지 지독한 반혁명적 허풍장이들이다."(같은 글, p.429)
"1882년 6월 20일, 엥겔스는 조르게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투쟁을 과거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 [일반적으로, 독일에서 사태는 훌륭하게 진행되고 있다. 당의 문필가 신사분들이 반동적인…전향을 야기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비참하게 실패했다.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들이 어디에서나 당하고 있는 비난은, 3년 전보다 그들을 더 혁명적으로 만들었다. … 이 사람들(당의 문필가들)은 온갖 희생을 치루고서 구걸이라고 해서 부드러움과 온유함, 아첨과 겸손함으로 반사회주의 법률의 폐지를 확보하기를 바랬는데, 그 까닭은 반사회주의 법률이 자신들의 문필적 돈벌이를 곤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법이 폐지되자 마자 … 분열이 명백히 공개적인 것으로 될 것이고, 또 피어레크들과 회흐베르크들은 마침내 뒤로 나자빠질 때까지 때때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별도의 우익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사회주의 법률의 채택 직후에, 즉 회흐베르크와 슈람이 『연보』에 당 사업에 관한 가장 파렴치한 판단을 발표하면서 보다 교양있는(gebildetes 대신 jebildetes-엥겔스는 독일 필자들의 베를린 억양을 암시하고 있다), 세련되고 우아한 당의 행동을 요구했을 때 그와 같은 점을 알린 바 있다.]
1882년에 했던 베른슈타인주의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1898년과 그에 뒤이은 여러 해 동안 뚜렷하게 확증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특히 맑스가 죽은 뒤에, 엥겔스가 독일의 기회주의자들이 왜곡한 것을 똑바로 펴기 위해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같은 글, pp.429-30)
레닌은 엥겔스의 "노력"을 나열한다.
"1884년 말. 증기선 보조금에 찬성투표한 독일사회민주당의 라이히스타크 의원들의 [쁘띠부르조아적 편견]이 비난받았다. 엥겔스는 그가 이 주제에 관하여 많은 편지르 써야만했다고 조르게에게 알렸다(1884년 12월 31일자 편지)".(같은 글, p430)
"1885년. [증기선 보조금]의 전모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엥겔스는 [상황은 거의 분열의 지경까지 다가갔다]고 썼다(6월 3일).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의 [속물근성]은 [엄청난] 것이었다.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쁘띠부르조아적 사회주의 의회그룹이 불가피하다]고 엥겔스는 말했다."(p430)
"1887년. 엥겔스는 자기에게 편지를 써보낸 조르게에게, 당은 피어레크(회흐베르크 유형의 사회민주주의자)와 같은 의원들을 선출함으로써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응답했다. 엥겔스는 할 일이 전혀 없으며 노동자 당은 라이히스타크에 보낼 훌륭한 의원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우익의 신사분들은 자기들이 용인되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반사회주의 법률 때문이며, 당이 다시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는 바로 그 날 자기들이 당 밖으로 내쫒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당이 의회의 영웅들보다 더 나은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바람직했었다](1887년 3월 3일). 리프크네히트는 화해주의자이며 -엥겔스는 불평했다- 그는 항상 차이점을 얼버무리는 문구를 사용한다."(p.430)
"1889년. 파리에서 국제 사회민주주의 대회가 두 번 열렸다. 기회주의자들(프랑스의 가능주의자들이 이끈)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 당시 68살이었던) 엥겔스는 청년의 열정을 갖고 투쟁에 뛰어들었다. 많은 편지들(1889년 1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이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에 바쳐졌다. 그들뿐 아니라 독일인들-리프크네히트, 베벨 및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화해주의적 태도 때문에 비난당했다.
가능주의자들은 자신들을 프랑스 정부에 팔아버렸다고, 엥겔스는 1889년 1월 12일에 썼다. 또 엥겔스는 가능주의자들과 동맹한 영국 사회민주주의 연합(S.D.F.)도 비난하였다. [이 저주받은 대회와 관련하여 글을 쓰고 분주히 돌아다니느라고 나에게는 그밖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다.](1989년 5월 11일). 가능주의자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는데도, 우리 사람들은 잠자고 있다고, 엥겔스는 화를 냈다. … 엥겔스는 베른슈타인과 함께 기회주의자들에 대항하는팜플렛들(그것들에는 베른슈타인의 이름으로 서명이 되었지만 엥겔스는 그것들을 "우리의 팜플렛"들 이라고 불렀다.)을 썼다.
[S.D.F.를 제외하면, 가능주의자들은 전유럽에서 자기들 쪽에서는 단 하나의 사회주의 조직도 갖고 있지 않다.(1889년 6월 8일.) 결과적으로 그들은 비사회주의적 노동조합에 기대고 있다.](우리 나라에서 폭넓은 노동당, 노동대회 등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야 한다.!). [아메리카에서 그들은 한 명의 노동의 기사를 얻게 될 것이다] 적은 바꾸닌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에서와 같은 적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가능주의자들의 깃발로 대체된 것은 겨우 이런 차이 때문이었다: 작은 규모의 양보를 위해, 특히 지도자들(시 의회, 노동교환소등에 있는)에게 좋은 보수를 받는 일거리를 준 댓가로 부르조아지에게 원칙을 파는 것.] 브루스(가능주의자들의 지도자)와 하인드먼(가능주의자들과 연합한 S.D.F.의 지도자)은 [권위주의적 맑스주의]를 공격했으며,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핵]을 형성하기를 원했다.
[당신은 독일인들의 순진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모두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지어 베벨에게 설명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들였다.](1889sys 6월 8일) 그리고 두 번의 대회가 열렸을 때, 혁명적 혁명적 사회민주주즈이자들으 숫자가 가능주의자들(노동조합주의자들, S.D.F., 일부 오스트리아인들 등과 연합한)의 숫자를 앞질렀을 때, 엥겔스는 즐거워했다.(1889년 7월 17일). 그는 리프크네이히트와 다른 사람들의 화해적인 계획들고 제안들이 실패했기 때문에 기뻐했다.(1889년 7월 20일)."(같은 글, pp.430-1)
"1893년. 페이비언들에 대한 응징, 이것은 베른수타인주의자들에 대한 판결을 통과시킬 때 암시된다. … [drl 영국에서 페이비언들은 사회혁명의 불가피성을 깨닭을 정도의 이해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이 거대한 임무를 거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맡길 수는 없어 스스로 선두에 나설 정도로 친절한 출세주의자들이다.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근본 원칙이다. 그들은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자치적 사회주의이다; 하여간 한동안, 국민이 아니라 공동체가 생산수단의 소유자로 되어야 한다. 그 당시 그들의 사회주의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의 극단적이지만 불가피한 결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그들의 전술은 적으로서의 자유주의자들에게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회주의적 결론들 쪽으로 밀고나가서, 그들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자유주의를 사회주의로 물들이는 것이다-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후보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을 자유주의자들에게 고정시키고 자유주의자들에게 억지로 붙게 하거나, 또는 사회주의자들을 속여 그들을 잡게 하는 전술이다. 물론 그들은 이렇게 하는 사이에 자신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거짓말을 들었고 또 스스로 사회주의를 기만했거나, 아니면 사회주의에 관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같은 글, p432)
레닌은 [고전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지식인주의적 기회주의를 어떻게 평가하였는가]라는 소제목아래에 엥겔스의 또 다른 "노력"을 인용한다.
"1894년. 농민문제. 1894년 11월 10일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대륙에서 성공은 더 많은 성공에 대한 욕구를 개발하고 있으며,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농민에 대한 사냥이 유행이 되고 있다. 먼저 프랑스인들은 낭트에서 라파르그의 입을 통해…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농민의 파멸을 재촉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라고 선언할 뿐 아니라…또한 그들은 조세, 고리대, 지주들에 대항하여 소농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는 협력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 어리석고, 둘째,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하지만 폴마르는 프랑트프라트에 나타나서는, 비록 그가 상부 바이에른에서 다루어야 하는 농민은 라인란트의 빚에 찌든 소농민이 아니라 남녀 농장일꾼들을 착취하고 가축과 곡물을 다량으로 파는 중간농민, 심지어 대농민임에도 불구하고, 농민전체를 매수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원칙 전체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1894년 12월 4일. […아주 아주 기회주의적이 되었고 또 평범한 사람들의 당으로 전환되어 버린 바이에른인들(즉, 다수의 지도자들과 최근에 당에 가입한 많은 사람들)은 바에에른 의회에서 예산안 전체에 대해서 찬성투표를 했다; 특히 폴마르는 농장일꾼들 대신 상부 바이에른의 대농민들-25내지 80에이커의 토지(10 내지 30 헥타의 토지)를 소유하며, 따라서 임금노동자들이 없으면 운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획득할 목적으로 농민들 가운데서 선동을 시작했다.]
이렇듯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가 10년 이상 동안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의 기회주의에 대해 체계적으로 굽힘없이 싸웠으며, 또 지식인주의적 속물주의와 사회주의 안의 쁘띠부주조아적 관점을 공격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일반대중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맑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 정책과 전술의 모범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맑스주의의 창건자들이 그 당의 [우익](엥겔스의 표현)에 대해 얼마나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야 했던가를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엥겔스가 죽자마자 이 은폐된 전쟁이 공공연한 전쟁으로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독일사회민주주의의 수십 년 간의 역사적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같은 글, p.433)
"1889년에 미숙련 노동자들(가스 노동자들, 부두 노동자들 등)의 젊고 신선한 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새롭고 혁명적인 정신으로 두드러졌었다. 엥겔스는 그것에 대해 기뻐하였다. 그는 이 노동자들 가운데서 선동을 수행한 맑스의 딸 투시가 해낸 역할을 기뻐하면서 언급했다. […여기에서 가장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은]하고 엥겔스가 1889년 12월 7일 런던에서 편지를 쓰면서 말하기를, [노동자들의 골수 깊이 뿌리박힌 부르조아적 '존경심'이다. 그 각각의 계층을 의문 없이 인정하고, 또 각각 그 나름의 긍지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더 나은 자들' 그리고 '우월한 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수많은 계층으로의 사회의 분열은 부르조아가 아직도 자신들의 미끼를 물게 하기가 상당히 쉽다는 것을 발견할 정도로 오래되고 굳게 확립된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존 번즈가 자기 계급과 함께 하는 자신의 인기보다는 추기경 매닝, 시장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부르조아지와 함께 하는 자신의 인기를 더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그리고 샹피옹-퇴역 중위-은 부르조아와 내통하였고, 특히 보수적 분자들과 함께 교구목사들의 교회에서 사회주의를 설교했다. 그리고 심지어 내가 최선의 인물이라고 여기는 톰 맨조차도 자기는 시장과 같이 점심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을 프랑스인과 비교하면 혁명이 이런 측면에서 얼마나 좋은 영향을 주는가를 깨닫게 된다."(같은 글, pp.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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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이 글을 쓴 목적은 명확하다. 러시아 혁명운동에의 복무를 위한 당연한 이유에서이다. 레닌의 글이 영국과 아메리카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교훈으로부터 시작했지만 독일의 운동에 대한 언급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도 그 까닭이다. 당시 러시아에는 한편에서는 맑스와 엥겔스를 인용하며 "[아메리카와 러시아의 대비]로부터 폭넓은 결론들을 끌어내" "폭넓은 노동당"의 건설을 주장하는 멘셰비키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러시아-인용자)에서는 막대한, [빛나는] 그리고 부유한 자유주의적-부르조아 신문이 [모범적인] 충성심, 의회적 합법성, 이웃나라 독일 노동계급운동의 겸손과 중용에 대해 프롤레타리아에게 나팔을 불어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부르조아 배반자들의 이러한 탐욕적인 거짓말을 우연이나 또는 카데츠 진영의 특정한 과거와 미래의 장관들의 개인적인 부패에 기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지주들과 자유주의적 부르조아의 깊은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거짓말, 이런 [대중들의 우매화]([Massenverdummung]-1886년 11월 29일 편지에서 엥겔스의 표현)에 대해 싸우는 데 있어서, 맑스와 엥겔스의 편지들은 모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무기로 기여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부르조아의 탐욕적인 거짓말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범적인 [겸손]을 인민에게 내세운다. 이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도자들, 맑스주의 이론의 창시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인의 혁명적 언어와 행동은 피어레크 일당(독일 라이히스타크 그룹의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위선을 아주 희미하게 들리게 만들었다.](이 말은 프랑스 하원에서 노동그룹의 형성과 관련하여 그리고 프랑스 급진주의자들을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분열시킨 데카제빌 파업과 관련하여 한 말이었다.)[오로지 리프크네히트와 베벨만이 지난 사회주의 논쟁에서 연설했으며 그들은 둘 다 훌륭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 논쟁을 갖고 그들 모두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예의바른 사회에 한 번 더 나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제사회주의운동의 독일 지도부가, 특히 그들이 그토록 많은 속물들을 라이히스타크에 보낸(이것은 사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뒤에,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독일에서는 모든 일이 평화적인 시기에 속물적으로 된다; 따라서 프랑스 경쟁자의 일침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1886년 4월 29일 편지)"(같은 글, p435)
레닌은 "아메리카와 러시아의 대비"를 주장하고 영국과 미국 관련하여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전술을 러시아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자들을 비판한다.
"자유주의적 부르조아지가 자신들의 독립적 정당을 결성하기 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정당을 결성했고 부르조아 정치가들에게 투표하는 전통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당면한 임무들이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적인 것인 나라들이나 역사적 상황"(같은 글, p427) 그리고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나라, [의회적 형태로 치장한 군사독재](『고타강령 비판』에서 맑스의 표현)가 지배했었고 아직도 그러는 나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래 전에 정치 속으로 내던져졌고 또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나라"(같은 글, p434)에
"영국과 아메리카 노동계급운동의 근본적인 …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딪힐 어떤 커다란, 전국적인, 민주적인 과제들의 결여; 부르주아 정치가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종속;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그룹들, 한줌의 사회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고립; 선거에서 노동대중 가운데서의 최소한의 사회주의적 성공조차 없다는 것 등."(같은 글, p.427)과 같은 조건의 나라에 적용되는 전술("모든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분파주의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뒤흔들어 놓기 위해서 노동계급운동과 결합하라")을 적용하려는 멘셰비키들의 주장을 레닌은 "일면적"이고 "분파적"이라고 비판한다.
레닌은 러시아에는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의 운동에 대한 "교정", 즉 "속물주의, [의회주의적 백치병](1879년 9월 19일자 편지에서 맑스의 표현) 및 쁘띠부르조아적인 지식인주의적 기회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것의 적용이 더욱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또 "노동계급운동의 임무와 범위에 대한 의회주의적 속류화와 속물적 퇴화"에 대한 투쟁에서 보여준 "그들의 동지적이고 솔직한 비판, 즉 외교술이나 사소한 고려들과는 거리가 먼 비판의 정신 전체와 실체"의 "교훈"을 배우기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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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요약한 두 개의 노선("영국과 아메리카 사회주의자들에게 보낸 그들의 호소 가운데 가장 일관된 것은 노동계급운동과 결합하여 그들의 조직들에서 편협하고 거만한 분파주의적 정신을 근절하라는 것"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속물주의 [의회주의적 백치병] 및 쁘띠부르조아적인 지식인주의에 굴복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중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노선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당시의 두 조건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그냥 다르다기 보다는 섞여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올바른 전략과 전술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에게서 레닌이 교훈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그들 모두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하며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식상한 말이지만 맑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다. 이는 레닌주의에 대해 적용해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 한 것처럼 나는 여기서 무엇인가 무엇을 제안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레닌의 글을 주로 인용하는 것으로서 좌파진영에 하나의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의 임무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좀 악의적으로 질문하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영국과 아메리카에 가까운가? 아니면 독일이나 러시아에 가까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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