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을 논하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코르닐로프 반란'이나 논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가(심)해 보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으리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좌파진영의 어느 한 "전술"의 근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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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현 탄핵정국에 대한 좌파들의 전술을 보자. 그것들에게서 정세변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결여되어 보인다. 또한 전술 도출을 위한 치열한 노력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정세변화는 전술의 변경을 요구한다. 물론 전술의 변화는 정세의 변화가 그것을 요구할 때 만이다. 지금은 정세의 변화가 전술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좌파들은 이에 대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해오던대로 혹은 그보다 못한 전술로 정세에 즉자적이고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민중탄핵", "국민발의제", "국민소환제" 등등은 "의회탄핵"과 "탄핵"을 통해 확인된 "의회정치 파탄"에 대한 즉자적이고 수동적인 대응이다. 노무현의 탄핵을 주장하려 했거나 직접민주제를 주장하려고 했어도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주장되었거나 전략적으로 주장되었어야지 탄핵국면에 새삼스레 주장될 것은 아니다. 그러한 탄핵되어야 할 사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고, 의회정치(대의정치) 파탄과 직접민주제에 대한 주장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주장되었던 것이다. 정세가 변하자 이런 구태의연한 것들을 새삼스러운 듯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무능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 이와는 다르게 [다함께] 동지들은 현 탄핵정국에서 전술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좌파조직보다 우월하다. 정세가 변화하자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민감하게 대처하려는 태도는 훌륭하다. 대중이 진출하자 누구보다도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 대중들과 결합하려하고 자신의 행동을 원칙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역사의 경험에서 도출하려는 태도 역시 훌륭하다.(물론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가두에서 반전서명을 받고 3.20 집회를 조직하기 위해 쏟은 그들의 노력이다.)
물론 훌륭한 태도와 자세 그리고 선의가 전술의 올바름을 저절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다함께] 동지들이 탄핵정국에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좋은 예다. 나는 몇몇 [다함께] 동지들이 왜 잘못된 전술로 귀결됐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이 게시판에서 그 까닭의 일부를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한마디를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그들은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나는 그들이 나의 미래의 동지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들의 전술 자체에 대해서 왜 잘못됐는지를 다루지는 않겠다. 현재의 전술에 대해서 나의 주장은 이미 밝혔고(「전술을 생각한다」) 또 다른 많은 글에서 주장되고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래의 인용문을 읽고 들었던 생각과 그것과 관련된 사실, 즉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몇몇 [다함께] 동지의 잘못된 이해에 국한해서만 검토하겠다.
(이에 대해 이미 채만수소장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참조를 위해 옮기겠다.
"그들은 역시 '국제사회주의자들' 다웠다. '다함께'는, 지금 그들의 의미만을 살려서 대략 옮기자면, '코로닐로프 반란 때에 볼쉐비키는 케렌스키 정권을 방어하여 반군과 싸웠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대중을 전취, 혁명을 성공시켰다,' '따라서 지금 노동자의 힘과 사회진보연대 등 좌파가 오불관언하는 것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오불관언'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잘못이다,' '보수야당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탄핵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고, 시위와 동맹파업, 총파업을 조직하자,' '3·20반전행동의 날에도 우익쿠데타 저지 슬로건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난파해 몰락해 가는 한나라당 등이 의사당에서 벌인, 그것도 계략에 빠져서 절망적으로 벌인 비극적인 코미디 한 토막을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의 군사반란과 대등하게 취급하다니! "아는 것이 병"이고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속담은 꼭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혁명적 공문구를 남발하면서 '이적행위'를 저지르고 있다."(채만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 #2 )
3. [다함께] 김하영씨는 그의 글(「민중운동은 왜 탄핵에 반대해야하는가?」,『다함께』26호)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동안 노무현이 저질렀던 일에 대한 복수로, 좌파가 우익 야당들의 노무무현 탄핵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우리가 우익의 반격을 패퇴시키지 않은 덕분에 우익 정당들이 권력을 찬탈한다면 그들은 맨 먼저 노동자·민중운동을 공격하는 일부터 착수할 것이다. 우리가 노무현을 더 나은 대안으로 지지해서 우익 야당들의 노무현 탄핵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싫어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도 우익으로부터 방어해야 할 때가 있다."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볼세비키는 1917년 8월(구력) 코르닐로프 장군이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이런 상황을 맞았다."(당시 케렌스키가 볼세비키를 엄청나게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닐로프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고) "볼세비키는 코르닐로프 반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노동계급의 신임을 크게 얻었고, 결국 그 해 10월" "케렌스키 정부를 대체했다."
볼세비키가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코르닐로프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그 "코르닐로프 반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노동계급의 신임을 크게 얻었고 결국 그 해 10월" 혁명에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김하영씨는 코르닐로프 반란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볼세비키의 전슬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선택하여 그것도 왜곡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살펴볼 것이다.
3. 코르닐로프 반란
길지만 먼저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살펴보겠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들은 가급적 인용문의 원문 그대로이다.
"5. 꼬르닐로프 대장의 반혁명적 음모. 뻬뜨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들 편으로의 소비에트의 전이.
부르죠아지는 모든 정권을 장악한 후, 무력하게 된 소비에트를 격멸하고 노골적인 반혁명적 독재의 수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백만장자 랴부신스키는 파렴치하게 말하기를, 「기왕의 여윈 손과 대중적 빈궁은 민중의 거짓 벗들인 민주주의적 소비에트와 위원회의 멱살을 틀어쥘 것임으로」 이점에서 자기는 역경(逆境)의 출구를 보노라고 했다. 전선에서는 병사들에 대한 야전 군법회의와 사형집행이 널리 시행됐다. 1917년 8월 3일에 총사령관 꼬르닐로프 대장은 후방에서도 사형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8월 12일에 모스크바 대극장에서 부르죠아지와 지주의 세력을 동원할 목적으로 임시정부가 소집한 국무협의회가 개최됐다. 협의회에는 주로 지주, 부르죠아지, 대장들, 장교들 및 까작크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소비에트는 멘셰비키들과 에쎄르들을 협의회의 대표로 보냈다.
국무협의회를 개최하는 날에 볼셰비키들은 항의의 표시로써 다수의 노동자들을 망라한 총파업을 모스크바에서 결행했다. 동시에 허다한 기타 도시들에서도 파업이 결행됐다.
에세르 게렌스키는 거드름을 빼면서 협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어떠한 혁명운동의 시도든지, 그 중에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자의로 탈취하는 시도까지도 '철혈'로 진압하겠다고 을러댔다.
반혁명적 꼬르닐로프 대장은 위원회와 '소비에트 폐기'를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은행가, 상인, 공장주들은 금전과 원조를 약속하면서 대본영(그 때에 총사령관 참모부를 이렇게 명칭했다)에 있는 꼬르닐로프 대장한테로 줄지어 갔다.
'동맹국', 다시 말하면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도 꼬르닐로프 대장에게로 찾아가서 혁명을 반대하는 조치를 지체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사태는 혁명에 반대하는 꼬르닐로프 대장의 음모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꼬르닐로프의 음모는 공개적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음모에 주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음모자들은 볼셰비키들이 뻬뜨로그라드에서 혁명의 반주년 기념일인 8월 27일을 기하여 폭동을 준비한다는 낭설을 퍼뜨렸다. 게렌스키를 우두머리로 한 임시정부는 볼셰비키들에게 대들었으며 프롤레타리아당을 반대하는 테러를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꼬르닐로프 대장은 군대를 뻬뜨로그라드에 출동시켜 소비에트를 쓸어버리고 무단독재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군대를 모집하고 있었다.
꼬르닐로프는 자기의 반혁명적 진출에 대해 게렌스키와 미리 협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꼬르닐로프가 진출할 시각을 바로 앞에 두고 게렌스키가 방향을 돌연히 변경해 자기의 동맹자에게서 물러섰다. 게렌스키는 민중이 꼬르닐로프 반란을 반대하고 일어나서 그것을 격멸한 뒤에 만일 게렌스키 임시정부가 즉시 꼬르닐로프와 갈라서지 않으면 민중이 임시정부도 한꺼번에 소탕할까 두려워 취한 행동이었다.
8월 25일에 꼬르닐로프가 「조국을 구원하노라」고 선포하고 제3기병군단을 크류모프 대장의 지휘하에서 뻬뜨로그라드로 출동시켰다. 꼬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대답으로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반혁명에 대한 적극적 무장적 배격에 나서라고 부르짖었다. 노동자들은 신속히 무장을 하고 배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적위군 대열은 이 시일에 몇배나 성장되었다. 직업동맹들은 지기들의 맹원들을 동원했다. 뻬뜨로그라드의 혁명적 병사부대들도 역시 전투적 준비에 나섰다. 뻬뜨로그라드 주위에는 참호를 파놓았고 철조망을 쳐놓았으며 철도 레일들을 끊어 놓았다. 크론스타트의 무장한 해군 수천 명은 뻬뜨로그라드를 방위하려고 도착했다. 뻬뜨로그라드를 공격하는 '야만사단'으로 대표들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카프카즈 산간 출신인 이 병사들에게 꼬르닐로프의 진출에 대한 의의를 이해시켜 줌으로 인해 '야만사단'은 뻬뜨로그라드에 대한 공격을 거절했다. 선동원들은 꼬르닐로프의 기타 부대들에도 파견됐다. 위험성이 있는 이곳저곳에는 모두 다 혁명위원회와 꼬르닐로프파와의 투쟁본부가 성립됐다.
혼비백산한 에쎄르 멘셰비키 당수들과 게렌스키까지도 이 당시에는 볼셰비키들에게서 보호를 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도에서 꼬르닐로프를 격파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볼셰비키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꼬르닐로프 반란을 격파함에 대중을 동원하면서도 게렌스키정부와의 투쟁을 중지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대중 앞에서 그 전(全)정책에 의해 꼬르닐로프의 반혁명적 음모를 객관적으로 도와 주던 게렌스키, 멘셰비키들 및 에쎄르들 정부의 정체를 폭로했다.
이 모든 정책을 채용한 결과 꼬르닐로프 반란이 격파됐다. 크류모프 대장은 자살했다. 꼬르닐로프와 그의 공모자 제니낀과 루꼼스끼는 검거당했다(그런데 얼마 후에 게렌스키가 그들을 석방했다).
꼬르닐로프 반란의 격파는 혁명과 반혁명간의 세력 관계를 일시에 폭로해 밝혀 놓았다. 이 사실은 대장들과 입헌민주당을 비롯, 부르죠아지의 포로가 된 멘셰비키들과 에쎄르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반혁명적 진영이 반드시 패망할 것임을 보여줬다. 힘겨운 전쟁을 오래 끄는 정책과 장기간 전쟁으로 인해 생긴 경제적 파괴가 모조리 그들의 영향을 민중 속에서 이탈 시켰던 것이다.
꼬르닐로프 반란의 격파로 인해 볼셰비키당은 반혁명의 어떠한 흉계를 막론하고 격멸할 능력을 가진 혁명의 결정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볼셰비키당은 아직도 지배적 정당은 되지 못했으나 꼬르닐로프 반란 때에 실질적인 지배적 세력으로 행동했다. 이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주저없이 볼셰비키당에 대한 지지를 실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꼬르닐로프 반란의 진압은 사멸한 듯한 소비에트가 실상 그 자체내에 혁명적 반격의 가장 강력한 잠재세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소비에트와 그의 혁명위원회만이 꼬르닐로프 군대의 진로를 끊어 놓았으며, 그들의 세력을 제거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었다.
꼬르닐로프 반란과의 투쟁은 쇠잔하기 시작한 노동자·병사 대의원 소비에트에 생기를 주었으며 타협정책의 포로에서 해방시켰고 혁명투쟁의 대로에 끌어냈을 뿐 아니라 볼셰비키당 축으로 인도했다.
볼셰비키들의 영향은 소비에트내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성장했다.
볼셰비키들의 영향은 역시 농촌에서도 신속히 퍼져나갔다.
꼬르닐로프 폭동은, 지주들과 대장들이 볼셰비키들과 소비에트를 격파하고서는 다음으로 농민들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농민대중에게 보였다. 중농들은 그 동요성 때문에 1917년 4월부터 8월에 이르는 동안 혁명의 발전을 방해했지만 그들도 꼬르닐로프가 격파된 후에는 빈농대중과 결탁하면서 결정적으로 볼셰비키 측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조영명 엮음, 『러시아혁명사』, pp.204-7, 온누리, 1985)
[다함께] 동지들의 주장처럼 꼬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의 단호한 투쟁은 볼셰비키가 "노동계급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병사들과 농민(중농까지)의 신임까지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케렌스키 정부를 대체"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에 대한 볼셰비키의 태도에 관련한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가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게 되는 그 조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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