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선거를 여는 사람들의 총선이야기 Another0415
[다함께 비판]-코르닐로프 반란(2)
Metheus
33 8794  /  6805
2004년 03월 25일 14시 38분 46초
- 31
4. "코르닐로프 반란"의 배경과 경과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벌어진 시위는 봉기로 전환했고 혁명은 성공했다. 짜르를 몰아낸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기관이 만들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혁명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소비에트와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지배기관인 임시정부가 그것이다. 이중권력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점차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부르주아지의 영향에 노동자계급이 감염되어서인데 소비에트 내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우위를 차지하면서 임시정부를 사실상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하에 투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정부의 즉각 타도와 무장봉기를 호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구체적 정세에서는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의 평화적인 이행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월 테제]는 제국주의 전쟁의 종식과 부르주아지와 연합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전면 결렬을 주장함으로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양자로부터 비난받았으며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대립을 가져왔다. 케렌스키는 7월 4일 무장시위를 호소, 선동, 격려, 조직, 지도한 사람들을 전원 체포하여 '혁명에 대한 반역자'로서 재판에 회부하기로 한다.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는 독일첩자로, 반역자로, 무질서 옹호자로 탄압받고 체포되거나 피신해야 했다. 이것이 앞의 코르닐로프 반란 직전까지의 러시아의 정세였다. 이때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유보하기를 주장하고("[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이양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은 평화적 발전의 길 위에서 다음의 일보, 즉각적으로 실행 가능한 일보를 위한 슬로건이었다. 그것은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슬로건이었는데, 2월 27일과 7월 4일 사이에는 그것이 가능했고 또 마땅히 가장 바람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레닌, 「슬로건에 대하여」) "현재의 반혁명 및 현재의 소비에트의 배신에 맞서 싸우는 문제"에 대해 강조한다. 이와 같은 경로를 거친 후 형성된 정세는 아래와 같았다.

"코르닐로프가 전국에 반란지지를 호소하기 전만 해도 반동세력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군대내에서, 농촌에서, 그리고 소수민족 내부에서 승리하고 있는 듯 하였다. 군부지도자들, 유명인사들 그리고 두마의원들, 운행가들, 구지도자들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듯 보였다. 밀류코프는 [혁명은 끝났다]라고 파악했었다. 교회는 구래의 방식을 적당히 되풀이하면서 죄많은 인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였으며 사형집행관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월혁명의 지도자들은 제헌의회를 또 연기하였고 체레텔리의 경우, 사형폐지안에 반대하는 등 그처럼 반동세력에게 고분고분할 수 없었다. 반정부세력은 이제 끝장난 것으로 여겨졌다. 7월 이후, 무정부주의자들은 사라졌고, 볼셰비키는 도피했거나 은신 중이었다. 레닌은 변장하여 핀란드에 숨어있었고 트로츠키와 그의 동료들은 수감되어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두 달 동안 반동의 성공은 너무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기 때문에 레닌은 이 시점에 있어서 군부의 반란이란 전혀 무의미한 짓이라고 확신하고는 반란루머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다. 코르닐로프 역시 권력을 잡는 데에는 단지 손만 뻗으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마르크 페로, 『1917년 10월 혁명』, 거름, pp.86-7)
이러한 상황에서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더욱 반동적인 정책(게엄령의 권한확대와 후방에 대한 사형제 도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이를 거부하지만 협상에 응한다.

"협상에 응하여 그가 내놓은 조건들을 수락하는 체 하였다. 여기에 하나의 계락이 숨어 있었다. 그는 코르닐로프에게 마치 르보프(홀리 시노드의 총독-인용자)가 질문자인 것처럼 하여 그의 요구조건들을 르보프에게 명기하여 주도록 하였다. 코르닐로프는 르보프에게 구두로 말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주었으니 이번에는 그가 덫에 걸려든 것이다."(마르크 페로, p.80)

케렌스키는 각료회의를 소집하여 코르닐로프의 쿠테타기도와 그의 해직을 알렸고 "코르닐로프 장군이 조국과 혁명을 배반하였다."고 전국소비에트에 알렸다. 코르닐로프 반란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사실 반란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나 버렸다. "케렌스키는 군대의 '무혈반란진압'을 축하하였다.(마르크 페로, p.82) 그러나 정세의 복잡함은 코르닐로프의 반란이 마치 임시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여겨지게 된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역시 사태를 그렇게 보고 임시정부 방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코르닐로프를 반대하지만 이것이 코르닐로프 행동의 공범자인 임시 정부를 방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즉 그는 코르닐로프에 대한 투쟁을 계속 벌이면서 임시정부와 그 조수로 전락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폭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레닌은 "'코르닐로프를 제거하라, 케렌스키를 지지하지 말라'는 슬로건은 민중들의 여망이었던 반동분자들과의 투쟁에 부응하고, 또한 케렌스키의 행동을 묵살함으로써 그가 코르닐로프에 대한 승리에서 얻게 될 민중들의 신임을 사전에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마르크 페로, p.84)

"대(對)코르닐로프 방위조직을 구성하는 가운데 민주진영의 정당지도자들은 서로 손을 잡게 되었다. 소비에트비상회의가 진행되던 8월 27-28일 밤 그들은 자기 노선을 확정하였다. 반코르닐로프 투쟁은 반혁명세력에 대한 혁명세력의 투쟁이 아니라 단지 반혁명세력이 취할 수 있는 상이한 두 방법간의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는 서로 취한 방법이 다를 뿐이지 모두가 반혁명세력으로서 투쟁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하는 종전부터 고수해온 입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까지 계속 논쟁이 되어 왔던 입장으로서 멘세비키, 사회혁명당과의 연합을 통해 고립상태를 벗어나자는 입장이었다. 투쟁의 사회적 기초가 확대되고 소비에트가 다시 7월사태 이전과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연합논리를 단순하게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부와의 협력을 다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볼셰비키 조직들은 또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레닌도 비록 자신의 부재중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이러한 노선변경을 인정·지지하였다."(마르크 페로, 같은 글, p.82)

김하영씨 말대로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는 소비에트로부터도 엄청난 탄압을 받았었다. 이러한 반동의 시기에 코르닐로프는 반란은 반동이 득세하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감행된 것이다. 코르닐로프와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케렌스키가 함께 반혁명의 길을 갔다는 것이나 코르닐로프가 군부독재를 획책하는 수구반동세력이고 케렌스키가 자유주의자이고 개량주의자인 것이나 또 "민주주의자로서 그(케렌스키-인용자)는 "코르닐로프의 주위에 운집해 있던 반혁명분자들과 반유대주의자들에게 강한 증오감을 느꼈다"(마르크 페로, p.84)는 점이나 코르닐로프를 제거하고 싶었고 그를 덫에 빠지게 한 후 제거한 것(마르크 페로, pp.80-1)을 보았을 때 코르닐로프 반란과 현재의 우리와 유사한 점은 있다. 즉, 한민자와 열린우리당이 함께 파병을 결정하고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을 비준하고 각종 신자유주의정책을 공조하는 것으로 함께 같은 길을 갔다는 것이 그렇고, 최병렬 등이 수구반동세력이고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는 것이 그렇고, 노무현이 그들에게 증오감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고, 덫에 빠지게 한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사소한 유사성을 제거하면 당시의 객관적 조건과 현재의 그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2월혁명-노무현 당선(?), 이중권력(임시정부, 소비에트)-이중권력(?)(대통령-의회)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다.

5. 케렌스키와 임시정부에 대한 레닌의 태도.

"코르닐로프 반란은 대단히 예기치 않은(그런 실점에, 그런 형태로일 것이라고는 예기치 않은), 그리고 완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사태 전환이다.
모든 급격한 전환이 다 그렇듯이, 그것은 수정과 전술상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모든 수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원칙하게 되지 않기 위하여 극도로 신중(extra-cautious)해야 한다.
무원칙하게 되는 자들은, (블로쟈르스키처럼) 방위주의로 미끌어져 들어가거나 (다른 볼셰비키처럼) 사회혁명당원들과의 블럭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그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오류이며 무원칙하다. 우리는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로 이양한 이후에만, 강화제의 이후, 비밀조약을 깨고 은행과 절연한 이후, 이러한 연후에야만 방위주의자가 될 것이다. 리가의 함락도 페트로그라드의 함락도, 우리를 방위주의자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나는 볼로쟈르스키가 이 글을 읽게 되면 대단히 좋겠다). 그때까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고 저쟁을 반대하며 방위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심지어 지금도 우리는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무원칙한 것이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오? 물론 우리는 싸워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이, 타협으로 굴러떨어져 자신을 사태의 추이 속에서 휩쓸려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몇몇 볼셰비키가 내딛고 있는 길과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엔 분리의 선이 존재한다.
우리는 케렌스키의 군대와 꼭 마찬가지로,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울 것이며 또한 케렌스키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의 나약함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차이점이다. 이것은 다소 미묘한 차이이지만 매우 본질적인 차이인 것이며, 망각해서는 안되는 차이이다.
그러면, 코르닐로프 반란이후 우리의 전술상의 변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케렌스키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형태를 바꾸고 있다. 그를 향한 우리의 적개심을 조금도 누그러뜨림이 없이, 그에 반대하여 말한 단 한마디의 말도 철회함이 없이, 그를 타도해야 하는 임무를 포기함이 없이, 우리는 당면한 정세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케렌스키를 타도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 맞서 싸우는 임무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인민들(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고 있는)에게 케렌스키의 나약함과 동요를 지적할 것이다. 이 임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수행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은 그야말로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변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변화란, 그야말로 중요한 이 임무가 이제는 케렌스키에게 다음과 같은 일종의 '부분적 요구들'(partial demands)을 제출하는 우리의 운동(campaign)을 강화시키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며 크론쉬타트와 비보르그와 헬싱키호르스의 군대를 소환하고 두마를 해산시키며 로드쟌코를 체포하고 지주소유지의 농민으로의 이양을 합법화하며 곡물과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를 도입하는 것 등등의. 우리는 이러한 요구들을 케렌스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고 케렌스키에게라기 보다는 오히려,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투쟁의 추이 속에 휩쓸려 온 노동자, 병사, 농민들에게 제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열의를 유지해야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해아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그들을 고무해야 하며 토지를 농민에게 즉각 이양할 것을 요구하도록 그들에게 역설해야 하며 로드쟌트와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두마를 해산하며, 『레치』 및 기타 부르조아 신문들을 폐간시키고 이들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는 것이 필요함을 그들에게 제의해야 한다. '좌파' 사회주의혁명당원들에게는, 특히 이와 같은 방향으로 역설해야 한다."(레닌,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게」,『레닌과 사회주의 혁명』,태백, 1989.)
(이 글은 1917년 8월 30일에 쓰여졌고 1920년 11월 7일 최초로 발간되었다. 레닌은 글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때로는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사태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짧은 편지는 너무 늦게 당도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 편지를 수요일에 쓰고 있는데, 빨라야 9월 20일 금요일이 되어서야 수취인들이 받아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나는 다음의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에 비해 우리의 너무나 좋은 여건이란…. 게으름은 우리의 중요한 내부의 적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자. 레닌이 언급한 "무원칙하게 되는 자들"에는 현재의 [다함께] 동지들이 들어간다. 그들은 열린우리당원들과의 "블럭으로", 노무현정부에 대한 "지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람들"의 하나로 되고 있다. 그러한 [다함께] 동지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오류이며 무원칙하다."
당시의 레닌이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처럼 우리 역시 노무현정부를 지지해서는 안된다.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처럼 우리도 보수반동세력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타협으로 굴러떨어져 자신을 사태의 추이 속에서 휩쓸려 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몇몇 볼셰비키가 내딛고 있는 길과 똑같"은 길로 가서는 안되는 것처럼 우리도 현재의 [다함께]와 같은 길로 가서는 안된다.
"케렌스키의 군대와 꼭 마찬가지로, 코르닐로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케렌스키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의 나약함을 폭로"해야하는 것처럼, 우리는 수구반동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노무현의 반노동자·반민중성을 폭로하여야 한다.
당시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슬로건이 '임시정부 방위'였던 것과는 반대로 볼셰비키의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다. 그런데 [다함께] 김하영씨는 러시아혁명을 들먹이며 '노무현정부를 방어해야 한다'고 한다. 웃지도 못할 일이다.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며 크론쉬타트와 비보르그와 헬싱키호르스의 군대를 소환하고 두마를 해산시키며 로드쟌코를 체포하고 지주소유지의 농민으로의 이양을 합법화하며 곡물과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를 도입하는 것 등등의", "요구들을 케렌스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고 케렌스키에게라기 보다는 오히려,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투쟁의 추이 속에 휩쓸려 온 노동자, 병사, 농민들에게 제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열의를 유지해야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해아 하며, 코르닐로프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장성과 장교들을 처리하도록 그들을 고무해야 하며 토지를 농민에게 즉각 이양할 것을 요구하도록 그들에게 역설해야 하며 로드쟌트와 밀류코프를 체포하고 두마를 해산하며, 『레치』 및 기타 부르조아 신문들을 폐간시키고 이들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는 것이 필요함을 그들에게 제의해야 한다. '좌파' 사회주의혁명당원들에게는, 특히 이와 같은 방향으로 역설해야"했던 것처럼 우리는 "파병반대", "파병군 철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 무효화", "신자유주의 정책 철회"등의 요구를 노무현에게 아니 노무현에게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구보수세력에 대항한 투쟁의 추이 속에 휩쓸려 온 대중들에게 제출해야 한다. (동요하거나 혼란에 빠진) 민주노동당원들에게는 특히 이와 같은 방향을 역설해야 한다. 현재 [다함께]는 이렇게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대중을 오도하고 있다.(김인식, 「민주노동당은 탄핵 반대운동을 지지해야」, 김하영「민주노총이 탄핵반대 투쟁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함께 27호』) 이 역시 웃지 못할 일이다.
마지막 하나 더 김하영씨는 "노동자·민중진영의 강화는 한쪽 옆에서 팔짱끼고 서 있는다고 해서 얻어지는게 아니다."라고 타이르며" "노무현지지자들과 뒤섞일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중요한 것은 이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진영의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애쓰는 것"이라는 내용 없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대중을 전취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는 "그동안 가장 단호하고도 일관된 입장를 견지해 온 볼셰비키"였다는 것과 "볼셰비키 세력이 그토록 급격히 확장된 데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정치현상의 저 밑에 잠재해왔던 대중들의 과격화 경향이었다. 정국의 위기를 통해 대중들의 과격화 경향이 급작스럽게 노출된 것뿐이다."(마이크 페로, p.87)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6. 사족 - 나의 인용글이 모두 스탈린주의에 오염된 것이라 매도될 우려에 대한 노파심에서 트로츠키의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해 평가한 글을 덧붙인다.

[코르닐로프 사건은 우리 쪽에 유리한 상황을 급격히 조성하면서 그간의 견해 차이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 작용을 했다. 그러나 견해 차이는 가라앉았을 뿐 소멸되지는 않았다. 이 때 우파는 혁명을 방어하고 그리고 일부분 조국을 방어한다는 기조 하에 소비에트 다수파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경향에 대한 레닌의 반응은 9월초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 나타났다. "원칙에서 이탈하고 있는 자들은 조국방위주의로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다른 볼셰비키들처럼 사회혁명당과 연합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들의 태도는 무조건 틀렸으며 무원칙하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치권력이 넘어간 후에야 우리는 조국방위주의자가 될 것이다. … 지금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무원칙한 행위이다. 누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코르닐로프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을 것인가? 물론 우리는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분계선이 존재한다. 일부 볼셰비키들은 이 선을 넘어서서 타협을 하면서 사태 전개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레닌,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게」(1917년 8월 30일)『vol. 25.pp.285-6』)](트로츠키, 「10월의 교훈」,『10월의 교훈 및 이행기 강령』, pp.42-3, 풀무질, 1996.)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에 볼셰비키가 유리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는 것은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트로츠키는 앞서의 레닌의 글을 인용한다. 이것은 그가 레닌의 평가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제자들을 자처하는 [다함께] 동지들과 반대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 사족 2.

이 글을 쓰던 중에 교수님 세분이 [함께] 발표한 글을 읽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이 그에 대한 비판이 아니므로 한마디만 언급하겠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걸 또 공부해야 하는가?)이 언급된 그 글에서 세 분 교수님들의 충정(좌파가 정세에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몇몇 슬로건에 대한 비판은 나도 공감한다.)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글은 교수님들다운 박식함을 자랑하는데는 충분한 글일지는 모르지만 "원칙에서의 이탈"이며 정세인식의 오류에서 발생한 잘못된 주장이다. 이것이 나의 한마디이다.

  
꿈동산   동지의 박식함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한 부분은 왜 한민자와 맞서 싸우는 것에 동의하시는 분이 <다함께>의 반우익 투쟁론이 노무현을 지지하는 거라고 단정하시는 건가요? -0001.11.30 00:00
덧말수정 덧말삭제
꿈동산   실제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분쇄하고 10월 봉기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을 주도하고 조직한 트로츠키는 "케렌스키의 군대처럼 싸우자"고 호소했습니다. 동시에 "케렌스키를 결코 지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합니다. 현실의 변증법은 대립되는 듯한 행동이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0001.11.30 00:00
덧말수정 덧말삭제
쓰기 목록 추천 수정 답글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