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남대문 앞까지 15만명 운집. 분명 이 사건은 한국 사회를 바꾸고 있다. 저녁 6시 무렵만 해도 겨우 6만 여명 정도가 모여 있었는데 불과 한 두 시간 사이 물밀 듯이 몰려오는 시민들은 그 넓은 도로를 꽉꽉 메우고 어느새 남대문을 향해가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렇게 자리를 메꾸고 촛불을 올렸다. 이 촛불은 과연 무엇을 바꾸어 낼 것인가? 지난 효순이 미선이 촛불처럼 어느 샌가 꺼져 버릴 것인가?
#1.반전 깃발 사라져 가다
이곳은 모든 깃발을 내려야 하는 곳이다. 광화문 사거리 일민미술관 5층에서 바라본 풍경은 씁쓸했다. 반전집회를 마친 5천 여명의 반전 깃발과 피켓은 점점 수만의 인파 속에 사라졌다. 반전투쟁 5천명, 탄핵반대 15만명.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탄핵무효 피켓만 허용되는 집회. 반전을 호소하는 것은 안되지만 한민자를 비판하는 것은 되는 집회. 과연 이 집회가 자유로운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는 집회지만 다양한 의사표현은 안 된다. 탄핵을 비판하는 것만 허용된다. 너무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닌가?
#2. 민주시민의 자원봉사
평화를 원했다. 경찰과 보수언론이 이 집회를 폭력집회로 몰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방향으로 난 무대 오른편을 막아선 경찰들. 누가 봐도 별로 이해가 안가는 씨츄에이션이다.
한 시민이 경찰에 항의한다. 그러나 이 시민을 말리는 사람은 자원봉사자 명찰은 단 사람들이다. 자원봉사자들은 남대문 방향으로 가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경찰과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 시민은 자원봉사자의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것을 경찰이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경찰이 지금 이 자리를 막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인권침해라구요"
촛불을 든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원봉사자의 말을 따르는데 유일하게 그들에게 개기는 시민이다. 그는 말리는 자원봉사자에게도 항의한다.
결국 그 시민은 자원봉사자에게 한나라당 프락치 아니냐는 소릴 듣는다.
"나의 인권침해에 항의했을 뿐인데 한나라당 프락치라니요"
"자원봉사도 힘듭니다. 우리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여기 봉사나온 사람들도 다 시민들입니다. 우리가 경찰과 싸움이 나면 우리는 폭력집단으로 보여집니다"
"우리의 권리침해는 상관없나요? 제가 엑스포에 온건가요. 촛불 들고 아무 데나 가라는 것이 민주주의 입니까? 그렇게 통제하지 마십시오"
민주시민의 자원봉사는 투철했다.
하지만 민주시민은 봉사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시민을 통제하고 있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민주주의 투쟁이라는데 그 시민은 너무 사소한 걸로 민주주의를 찾은 건가?
#3. 반가운 사람들 : 그들과 나의 공백은 어디서 온 것인가
오늘 촛불집회에서 반가운 사람을 몇 명 만났다. 모두 한때 날리던 운동권이었던 사람들. 그들이 오늘 집회에 나왔다. 92년도에는 민중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본에서 투쟁하며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지지를 가장 앞장서 비판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김대중은 당시 당선되지 않았고 분열주의자로 찍혔던 사람들이다.
친구들이 이날 촛불 시위에 나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단지 쪽수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너 왜 왔니?"
평소 전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없던 한때의 동지에게 놀란 투로 물었다. 의외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잖아. 그런데 이번 탄핵사태를 그냥 넘어가면 역사는 다시 수구세력에게 넘어 갈 것 같아. 그래서 한사람이라도 더 많아 보여야 싶겠다 해서 나왔어"
"그리고 수구세력에 의해 내 권리를 짓밟히고 싶지 않았어. 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거야"
권리라~ 정석을 들었다.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참가. 민주주의는 성숙하고 있는 건가.
"이 집회가 현실적으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지지로 나타날 텐데"
툭 까놓고 "너 노무현 지지자냐"라고 묻고 싶었다.
대답은 명쾌했다.
"음. 개혁세력이 이겨야한다고 봐. 보수세력이 너무해. 열린우리당은 깨끗하니까.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은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을 지지할 꺼야"
친구는 졸업하고서 생활전선에 살며 자신이 그렇게도 비판했던 비판적지지를 하고 있었다
"작년에 노동자들 엄청 죽고 FTA로 농민들 엄청나게 싸웠는데 노무현이 대안일 수 있냐"
"음 그런 문제야 있지만 그래도 노무현이 정치는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잖아"
한 때는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는데 불과 몇 년 사이 그들과 나 사이에는 어떤 공백이 생긴 걸까?
대부분의 대중들이 열린우리당 지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꼴통 우익들의 횡포에 열 받은 상태에서 열우당의 압승은 당연한 귀결로 나타나고 있었고 15만 명이 모인 촛불집회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그리고 노통의 인기 확인.
15만의 대중들 안에서 영빨 받으며 느낀 것은 여전한 노무현 개인에 대한 대중의 인기도였다. 그는 미워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이미지를 잘 가꿔왔고 대중들에게는 원칙을 지키고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통해 있다.
#4. 파열구
파열구는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평소 잘 알던 한 기자는 "요즘 조금 심하긴 해. 너무 열린우리당 지지로 가고 있는데... 시민운동진영이나 사회단체들이 작년 상황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작년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농민들이 그렇게 싸웠는데 ..."
조금만 관심 갖고 들여다보면 알 사람은 다 안다. 노무현 정권 1년은 민중들의 눈물과 한숨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학생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선전전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학생들이 든 피켓중 하나에는 "신자유주의 파산선고. 전쟁주범 노무현 하야"라는 글귀가 눈에 띄기도 했다.
'노무현 하야!' 상당히 쎄다.
하지만 그가 전쟁주범이라면 같은 전쟁주범인 최틀러가 하야하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하야 목소리도 가능하다.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의 급상승이 없었다면 이런 쎈 주장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415에서 열우당의 대승은 반드시 노동자 민중의 삶에 대한 파탄으로 되돌아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5. 2004년, 촛불은 역사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노대통령이 집권 1년 동안 노동자 농민 빈민에 대해 배신을 일삼았지만 운동진영은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에 대해 지금처럼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못해 왔다. 좌파들조차 노통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걸까.
이번 탄핵으로 인해 좌파운동진영에서는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 농민정책, 개방정책에 대한 책임을 보다 공세적인 '민중탄핵'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내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정권에 대한 입장이 보다 명확해 진 것이다.
하지만 촛불은 점점 거대해 져 가는데 좌파는 아직 무기력하다. 87년 6월 항쟁의 물결은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등장 시켰다. 6월 항쟁 이후 다시 최대의 민중들이 거리로 나선 지금 과연 이 촛불은 역사를 어떻게 바꿔낼 것인가? 87년의 실패한 항쟁의 타임라인 위에 설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