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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역관계'라는 단어도 운동권이 즐겨 쓰는 말인데, 운동권 용어에 대한 반감들이 많은 추세라 썩 좋은 느낌은 아니다. 말하자면 정치세력간 힘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운동주체의 관점이 가미되어 계급(정치세력)간 힘관계라 일컫는다. 여기서는 편의상 힘관계라고 쓰도록 하겠다.
계급 사회에서 정치세력간 힘관계는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서구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한, 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대개 의회 권력을 둘러싸고 힘관계가 형성된다.
가령 서구에서 '사민주의'는 주류와 비주류를 반복하며 1세기를 유지해왔다.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와는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에 따라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한 적도 많았지만 복지정책을 중심으로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에 의해 정치적 파산과 혼란을 거듭한 실패한 노선, 반민중적 노선이라고 낙인찍힌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남미의 경우 내전과 민중봉기의 전통이 이어지는 가운데 '민중주의'를 등장시켜내는 등 '자본'에 맞선 힘관계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남미의 대부분의 민중주의 역시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와 타협하는 요소가 많아 수시로 비판의 도마에 오르곤 한다.
서구 사민주의와 남미 민중주의의 흐름은 자본과의 힘 관계에서 일정하게 진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 보수(우익), 진보(사민당) 양당 체제 자체가 사회 밑바탕에서부터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치적 세력 재편이 요구되는 추세다. 사민주의가 우경화하면서 생기는 공백을 비제도적 정치세력이 장악하고 밀어붙이면서 사회 주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면 21세기형 새로운 대립 구도와 힘관계가 형성될텐데 아직은 희망사항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힘관계를 보자. 노무현정권 등장 이래 힘관계는 주지하듯 두 차원에서 긴장이 유지되어왔다. 하나는 자본,정권과 노동자,민중의 대립이고, 또 하나는 '보수'와 '개혁'간 대립이다. 전자는 자본,정권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와 노동자,민중의 생존권,노동권,생활권 쟁취를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대립해왔고(반신자유주의,반제,반세계화), 후자는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해왔다.(엄밀하게 보면 '정치개혁'이 핵심이며, 민주주의와는 별 연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자본,정권과 노동자,민중의 대립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자본이 동북아경제중심, 평화번영정책, 자유무역협정과 양자투자협정을 추진하고, 정권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노동유연화 정책을 강행하는 한 시기와 조건에 따른 대립 긴장의 차이는 있겠지만 노동자,민중과의 적대적인 기조는 결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정권은 적대적 힘관계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이러한 자본,정권의 적대적 힘관계 관리시스템에 일단 길들여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다시 빠져나오기까지는 두배 세배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보수'와 '개혁'의 대립은 정확히 말해서 지배분파간 대립이다. 대표적인 두 세력은 자본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추진하는 세력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자본경향, 지역주의, 세대의 지지기반이 다르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자본경향을 다소 극단적으로 나누자면, 반공-개발 시대 재벌중심의 자본운동과 관계를 맺고 해먹어왔던 '보수'와,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며 자본운동 경향의 주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개혁'간 긴장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치개혁' 문제로까지 소급된다. 이걸 잘 못보면 중간계급의 개혁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낳는다. 또 지역주의 문제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 주류질서를 장악해왔던 세대와 80년, 87년 민주항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세대간 지지 기반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차별적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자본의 이해를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차별이 점점 미세해지거나 부차화되는 추세라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총선을 경과하며 '개혁'이 주류로 올라선 것에 이론이 없지만, 동시에 '보수'가 몰락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 여기서 '보수'와 '개혁'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며, 경우에 따라서는 '보수'와 '개혁'의 현 구도가 '자본'의 힘에 의해 또다른 재편을 강제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고 작은 지배질서 개편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을 뚫어지게 살펴보자.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의 신념'만 빼고 나면 '보수'와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이 마치 매직아이처럼 한눈에 보일 것이다. '개혁'이 그만큼 토대가 취약하고, 이념과 정책에 있어 '보수'와 구분되는 독자적 위치를 갖기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병 문제나 탄핵 문제처럼 바른생활을 다루고, 정치적 신념을 다루는 사안에서는 '보수'와 확연히 구분되지만, '비정규직'이나 자유무역협정 추진 같은 물적 기반을 건드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와 어떤 구분점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고 봐라. '보수'와 '개혁'의 경계가 얼마나 취약한가가 머지 않아 드러날 테니까.
이번 총선에서 '진보'가 '개혁' 표 빼았기를 성공한 것에서 한껏 고무된 것도 '보수'와 '개혁'의 정치적 취약성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균열과 신자유주의정권의 정치적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들과의 약간의 차별만으로도 국민적 관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진보'가 사민주의적 정책을 이야기했건 사회주의 정책을 이야기했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력들, 즉 '보수'와 '개혁'의 정책과 구분된다는 자체로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탄핵으로 '개혁'이 지갑을 주었다고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 탄핵 역풍으로 '진보' 역시 지갑을 주었다는 말도 성립하는 셈이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진보'가 갖는 성과이자 동시에 한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자본,정권의 관리시스템은 도처에서 풀가동되고 있다. '보수', '개혁'으로 표상되는 지배계급들은 바보가 아니다. 지금 수준의 '진보'라면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견적서를 빼놓고 있는 것이다. 조중동의 유력 데스크들은 '진보'에 제도권 내에서의 역할에 대해 반복적인 주문을 던지고 있고, 또 그렇게 유도해나가고 있다. 무디스, 디스커버리캐피탈, S&P 등 월가 전문가들 대부분은 총선 결과가 한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더군다나 노무현의 개혁 추진이 더 가속화되어야 한다는 견해까지 덧붙이고 있다.
성장이냐 분배냐 논쟁은 신자유주의 개혁 추진의 범위 안에서만 갑론을박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진보'가 '진보'로 거듭나기 위해 의회투쟁전략을 보다 뚜렷이 해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은 오히려 여기에 있다. 총선 이후 '진보'가 보여준 첫 정치적 태도를 보라. '파병 철회', '탄핵 무효', '비정규직 해결' 이를 위한 '3당 대표 회동 제안'에서 지금 '진보'가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로 운전을 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이 와중에 참세상방송국 인터뷰에서 단병호가 노동자의힘이나 사회당도 다 들어와서 하면 된다고 한 발언은 '진보'를 제대로 세우고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맥락에서 보더라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갑을 주었으면 일단 주인에게 신고부터 해야지 할 것 아닌가. '보수'-'개혁'-'진보'의 힘관계를 '보수'-'진보'의 힘관계로 바꾸어내겠다는 자신감을 피력하는 것은 무어라 할 일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차제에 노동자,민중의 이해와 격리되는 심각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 다시 돌아보자. '보수-'개혁'-'진보'의 힘관계는 지금 상태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자본 운동과의 관계와, 수많은 정치적 사안을 둘러싸고 요동을 칠 것이다. 힘관계는 보다 역동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고, 그 속도는 과거에 비해 더 빠른 흐름을 보일 것이다. 지금 힘관계를 고려하면서도 앞으로 '대안'이 되어야 할 힘, 노동자 민중의 힘을 어디로 어떻게 보아내는 것이 바람직하겠는가.
뭐가 좋을까... 모든 힘을 '진보'로? 아니면 '진보'와 별도로? 아니면 안과 밖의 힘을 모아내는 방향으로? 셋 중 어떤 것이어도 한 수 가치는 하겠지만, 수를 놓기 전에 마음의 수를 두수 세수 두어보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을 깊이 하며 '대안'의 길을 가야한다는 그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 '민주노동당 의회진출 어떻게 볼 것인가' 게시판에 올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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