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국민발의제 이슈를 처음 제기하면서 가졌던 고민 중에 하나는 국민발의제, 혹은 국민투표라는 것이 갖는 양날의 칼이라는 성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즉, 우익이나 신자유주의 세력들에 의한 역이용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 말입니다. 그러나 이 고민의 밑바닥에는 바로 '대중의/대중에 대한 공포'(대중이 지배자들에게 갖는 공포일 뿐 아니라 대중이 지배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양날'이란 사실 이러한 '의/에대한'의 모호성 속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대중의/대중에 대한 공포'를 제어하기 위해서, 대중을 정치적 발언권(시민권!)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수동화/대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 남용 가능성을 조절하기 위해 삼권분립을 제도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외양을 보존합니다. 물론 이러한 삼권분립은 현재 신자유주의 하에서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부속기구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신자유주의 정책의 입법기구화) 때문에 이제 그러한 민주주의의 외양조차 갖추기 힘들어지고 있죠. 채만수 교수님께서 '개혁 파시즘'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목도하듯이, 만일 이번 총선에서 열우당이 상대적 다수당을 넘어 절대 다수당이 될 경우 이러한 현상은 거의 완성된 형태를 가질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장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외양조차 사라지는 셈이지요. 이것의 위험은 두 가지 가능성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민중들의 요구를 완전히 질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anti-politics의 극단화 혹은 과잉-파시즘의 등장). 또 다른 하나는 국가권력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된 극우 세력들이 자살택을 감행할 위험--이 가능성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형해화 된 부르주아 삼권분립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는 민중적인 새로운 민주주의의 대안의 기획이 필요해 집니다. 그렇다면 이를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는가?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대중들 내의 다양한 분파들 사이의 갈등을 통한 상호 견제로 대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부르주아 대표자들 사이의 견제가 아니라, 대중들 자신의 상호 견제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이러한 대중분파들 사이의 갈등(여기에는 부르주아분파들까지 포함이 될 것입니다)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나타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국가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즉 대중들이 국가에 의해 통제된다기 보다는 대중들의 갈등적 민주주의(conflictual democracy)를 유지하는 식으로 국가가 영속적으로 개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즉 대중의/대중에 대한 공포를 고민하는 방식에 있어서 관점의 역전이 일어나야 합니다. 고타강령비판에서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국가가 인민의 교육자(그것이 아무리 인민적인 내용을 갖는다고 할지라도)인 것이 아니라 인민이 국가의 교육자가 되어야 하며, 대중들의 능동화를 도와주고 보조하는 역할을 하도록 국가장치들을 탈구성-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발의제는 사실 이러한 영속적 민주화 과정의 첫단추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를 어떻게 더 극단적으로 확장시켜낼 수 있는가, 어떤 형태로, 또 어떠한 조건 속에서 그 확장이 가능한가를 연구하고 조사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양날의 칼'로서의 국민발의제를 제가 현재 사고하는 방식입니다(국민소환제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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