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선거를 여는 사람들의 총선이야기 Another0415
[장석준] 광화문의 길과 서울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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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3월 15일 15시 53분 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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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광화문의 길과 서울역의 길

어제(3. 12)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회 회의는 난상토론 끝에 결론 없이 끝났다. 민주노동당 등이 주장한 '보수정치권 심판' 기조와 일각에서 주장한 '수구세력 반동화 공세 분쇄' 기조 사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것이다. 건너서 들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라크 파병, 한-칠레 FTA 통과 안 시킨 노무현이면 모르지만 그런 노무현을 왜 구하느냐"는 정광훈 전 전농 의장의 발언이 가장 돋보였다고 한다.

아무튼 대중들보다도 소위 민중운동 내에서 혼란이 더 큰 게 사실이다. 대중들 내에서는 특히 386과 그 영향권 아래 있는 세대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화이트칼라 계층의 동요가 심하다. 노사모 집회장 한 편에는 민중연대 소속 단체들의 깃발이 보이고, 여전히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반복적으로 불려진다. "87년 6월의 정신으로 싸우자"는 외침도 자주 들린다. 심지어는 "80년 5월"까지 나온다.

이들의 정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금이 일종의 '혁명적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다. 개헌 음모론, 총선연기론 등의 '앞질러간' 분석이 횡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보수정치권 심판'을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은 분파적 이익만을 앞세우는 태평한 혹은 종파적 세력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려주어야 할 답은 하나뿐이다.

그렇다. 지금은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혁명적 위기의 상황'이 맞다. 지금 상황은 정확히 그런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노무현·열린우리당이 바라던 바 그것이고, 어쩌면 한나라당도 반겨할 바다. 당신들은 정확히 이들이 걸어놓은 포위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이 상황극 전체의 무효화를, 즉 헌재의 탄핵안 조기 기각을 주장하는 것이고 이 싸구려 연극의 공동 연출자인 보수정치권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이제 '혁명'이라는 말 앞에는 정확한 수식어가 하나 더 덧붙어야 한다.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87년 6월 항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 직접적인 출발점은 신민당이 놀랍도록 약진한 85년 동토선거였다. 지금 노무현이 원하는 것은 한 달 앞으로 닥친 총선을 바로 이 때 선거와 같은 양상으로 재연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제2의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의 거울상인 한나라당은 이 시도의 방패막이로서 자신의 새로운 존재 의의를 굳힌 것이다. 오직 민주당만이 출연료조차 없는 조연의 역할을 감수하고 나선 셈이다.

여기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무현식 가두정치의 관계를 오해해선 안 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정적 일상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출생을 잊어선 안 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야말로 거리에서 시작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야말로 혁명으로 시작했다. 프랑스대혁명은 그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무현의 대중동원극은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장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분명히 대중의 혁명적 동원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동원의 명분은 하나같이 '조국'이나 '공화국' 혹은 '민주주의' 등 추상적 담론이다. '조국이 공격받고 있다', '공화국이 위협 당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 '조국' 혹은 '공화국' 혹은 '민주주의'라는 '실체 없는' 아버지를 위해 우리는 봉기한다(노무현이라는 '실체'와 이를 동일시하는 노사모 식의 극단주의는 예외로 한다면).

(그리고 예외 없이 그 '조국', '공화국'의 적이 적시된다. 갈색 제복을 입고 거리를 맴도는 나치 돌격대도, '불의 십자가'[30년대 프랑스의 파시스트 단체]도 없고, 심지어는 갑자기 탱크가 나올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반혁명적 외세'가 되기 십상이다. 전농의 성명서에 느닷없이 미국의 음모론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사뭇 고전적 취향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 어구들은 민중들의 실제적인 요구와는 어떠한 실질적 관계도 없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동원 논리 속에서는 이것이 민중들의 모든 요구의 대명사로 등장한다. 아니 더 나아가 이 대명사를 위해 원래의 실제적인 요구는 한 발 접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어구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된다. '토지 개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부자들의 매점매석으로 물가가 뛰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는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리선언의 장부에 여성은 잘못 기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것이 프랑스대혁명의 논리였고, 자코뱅의 논리였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논리다. 그 메아리를 우리는 오늘 광화문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한-칠레 FTA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라크 파병은 철회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논리의 끝은 항상 혁명의 승리이면서 동시에 혁명의 패배였다. 어떤 혁명은 승리한다. 새로운 대의기구가 등장한다. 혹은 대의기구를 구성하는 대표 정파가 교체된다. '조국', '공화국', '민주주의' 등등의 적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정파가 '국민'의 대표가 된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이름에 값할 또 다른 진실은 억압된다. 토지는, 경제활동의 민주주의는, 가난한 시민과 여성의 권리는 장부에서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다. 이제 민중은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승리자들의 탄압에 고통받으면서.

대의제의 다수를 점한 정파는 이제 '조국', '공화국',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중의 구체적인 요구들을 압살하는 역할을 맡는다. '조국'의 논리는 경제성장(자본축적)을 위해 당장의 노동권·사회권은 뒤로 물려야 한다는 부르주아 계급의 논리와 필연적으로 만난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승리한 정파는 곧 부르주아 계급의 대변자가 된다. 과거에 그가 얼마나 혁명적인 경력을 자랑했는지는, 부르주아 계급과 얼마나 사소한 원한관계를 갖고 있었는지는 결코 문제가 안 된다. 이 자리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노무현도 상관없다. 최후의 승자가 결국 이 사회의 경제적 지배계급이라는 점이 보장된다면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수정치권 심판'의 기조가 발전해나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내걸어야 할 기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 역시 혁명의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지난 이백년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논리와 싸워온 또 다른 혁명의 논리다. 그것은 바로 부르주아 선동가들의 '대명사'에 통합될 수 없는, 항상 그것의 허구를 폭로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구체적인 요구들을 전면에 내건 동원과 변혁의 논리다. 그것은 자코뱅의 혁명에 대해 '물가 통제와 노동 시민의 권리'를 주장한 급진파의 논리이고, 2월 혁명의 한 복판에서 '빵과 토지와 평화'를 주장하며 천덕꾸러기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어떤 사람들의 논리다.

우리에게 그것은 노동 현장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전면에 내거는 것이고, 부르주아 계급의 농업 포기 정책에 저항하는 것이며, 이라크 파병 철회를 부르짖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위한 조세 정책과 무상복지의 확대를 주장하는 것이고, 국회의원 소환제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파열을 외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한 달간의 투쟁의 대지침이 되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어쩌면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위기이면서 또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민주노동당 같은 합법대중정당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참여는 항상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지닌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 여기에 노동자 농민 서민의 이름을 내건 당이 있다. 이 당을 대의기구에 진출시키자. 급기야는 이 당을 대의기구의 지배 정파로 만들자. 오직 그것을 위해 매진하자. 이러다 보면 애초에 왜 이런 당을 만들어 권력을 쥐려 했는가 하는 기억은 어느새 아련히 사라질 수도 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는 그런 일이 더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서 혹자는 기존 대의기구에 대한 참여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거리의 동원을 특권화한다. 하지만 이는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논리 속에서도 '대의제'와 '거리의 동원'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반의회주의적 초좌파는 이 이분법적 구도의 한 쪽(거리의 동원)을 특권화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역사적 접합을 추진하면서 또한 그 접합을 자신들의 기획 안에서 엄밀하게 제한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의도를 결코 깰 수 없다.

진정한 변혁의 길은 대의제와 거리의 동원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후자를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라, 둘 사이의 역사적 접합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국가기구 안에 가장 구체적인 민중의 요구들이 흘러 넘치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노동자 대중정당의 대의기구 진출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논리에 포섭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자기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대의제 내의 파견부대는 대중운동의 요구가 국가기구 안에 쇄도하는 통로와 촉매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작금의 상황은 민주노동당으로 하여금 이런 기회를, 그럴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노무현의 혁명 놀음 속에 또 다시 묻혀버릴 위기에 처한 민중들의 구체적 요구들을 전면에 내걸고 자신의 정치적 독자성을 지키고 더 나아가 바로 이러한 '최후의 고투'를 통해 제도 정치에까지 상륙했을 때,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부르주아 정치 일정 속에서 안정적으로 의회 지분을 확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주체적 선택 이전에 상황이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민주주의의 주체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17대 국회의 성격은 사뭇 흥미로울 것이다. '혁명'이 이미 완수되었음을 주장하는 세력과 그것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세력의 한 판 대결이 의회 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동시에 벌어질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수백만의 무권리 상태의 노동자와 농민과 빈민들이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는 이것이다. 이 길에서 지배계급의 사이비 혁명 논리(필연코 한 번[87년]은 비극을 펼쳐 보였고, 이제는 소극笑劇을 예고하고 있는)를 반복하면서 그 나팔수가 되길 원하는 자들은 어떠한 고려 요소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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