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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수 열사투쟁, 그 56일간의 투쟁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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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노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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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5월 03일 00시 37분 29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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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자 현장노동자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참조하십시오
사진과 함께 기사로 보시려면 www.hlabor.com에 들어가서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장기고
박일수 열사투쟁, 그 56일간의 투쟁 보고
하청노조 동지들에겐 패배감조차 사치다
열사정신 계승하는 비타협적 투쟁을 다시 시작하자!!
2월 14일 “하청노동자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며 당신 몸을 불사른 박일수 열사는 현대중공업을 비롯하여 이 땅의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폭로했다. 또한 원청 자본에 의한 현장 탄압과 어용노조의 부패한 작태를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현 시기 민주노조운동이 현장에서부터 어떻게 파괴되어가고 있는지를 똑똑히 깨닫게 했다.
그래서 박일수 열사의 죽음은 처음부터 현중 하청노조만의 또는 현중 노동자들만의 투쟁이 아니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며, 민주노조를 통해 노동자의 현장권력을 지켜낼 의무가 있는 모든 현장활동가들의 투쟁이었다.
크레인 점거농성이 전계급적인 열사투쟁을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박일수 열사가 하청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을 놓고 분신으로 항거했음에도 전국의 노동자들은 이것이 과연 전계급적 투쟁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물론 개별적인 활동가나 현장노동자들의 분노는 결코 작지 않았지만 과연 이 투쟁이 03년 열사투쟁만큼 전계급적 각성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이는 5명의 열사를 허탈하게 떠나보낸 죄책감과 함께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에서 어용 대의원의 지지를 받는 기회주의적 노조관료들이 노골적으로 자본 및 정부와의 타협노선을 표방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금속대공장과 공공부문 노조, 중소공장 노조 등 어디를 막론하고 자본의 현장 탄압과 어용의 득세에 흔들리지 않는 단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쩌면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최대 위기에 봉착하고 단사 현장의 투쟁력이 최악의 상태로 내몰려 있는 상황에서 - 어쩌면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 열사의 분신이 일어났고, 따라서 이 투쟁은 처음부터 투쟁주체들의 악전고투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열사의 시신을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는 동구(울산대병원)로 옮기기 위해 결국 부검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열기도 가시지 않은 열사의 몸에 더러운 칼을 댔다는 자책감에 하청노조와 지역의 동지들은 스스로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열사에 대한 온갖 음해도 모자라 대책위를 탈퇴하고, 심지어 유족을 납치하려 한 천인공노 할 범죄 집단인 현중 어용노조에 대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울분과 분노가 마침내 하청노조 4인의 크레인 점거농성을 낳게 되었고 이는 ‘부검, 열사음해, 납치기도’ 등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 앞에서 더 이상 참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단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으면 열사의 죽음은 개죽음이 될 뿐이라는 경고를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통보한 것이다.
크레인 점거농성이 시작되자마자 현중자본은 곧바로 진압작전에 돌입했고, 사전에 발각된 사무장을 비롯해 이운남, 김주익, 김동혁 동지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끌고 내려왔다. 사설 경비대의 폭력을 지켜만 보던 경찰은 경비대가 건네준 동지들을 연행하고 결국 이운남 동지는 크레인점거 농성의 주동자라는 혐의로 구속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크레인 근처에서 점거농성을 지켜보던 현중 직영, 하청노동자들은 경비대의 폭력과 경찰의 방조를 규탄하고 크레인 점거농성의 정당성을 현장 대중들에게 알리려 노력했지만 이조차 경비대의 폭력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결국 크레인 점거농성은 5시간만에 끝나고 이 사건을 계기로 현중자본은 전시를 방불케 하는 삼엄한 경비와 함께 더욱 강압적인 현장통제, 그리고 하청노조원 개개인에 대한 미행 등을 시작했다.
비록 5시간만에 진압당하긴 했지만 크레인 점거농성은 열사투쟁이 결코 쉽게 마무리될 수없고, 마무리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전체 노동자계급은 물론 자본에게도 천명했다. 한마디로 크레인 점거농성은 열사로 인해 시작된 전쟁에서 내부로는 전투의지를 확고히 하고, 적들에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는 이후 열사투쟁의 전 과정에서 크레인 점거농성을 준비, 감행한 동지들이 그 누구보다 철저히 투쟁했고, 또 크레인 점거농성과 같은 헌신적이고 전투적인 행동 없이는 하청노동자의 분노가 행동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 증명된다. 크레인 점거농성이야말로 골리앗 투쟁으로 대표되는 현중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계승하며, 숨죽이고 있던 현장노동자들에게 자신감과 투쟁의 긴장감을 안겨줄 수 있는 행동이었다.
공개조합원 동지들의 ‘인간선언’
크레인 점거농성 이후 열사투쟁은 더 이상 하청노조만의 또는 울산지역만의 투쟁이 아니었다. 전체 노동자계급은 패배감에서 깨어나 속속들이 울산으로, 울산으로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를 반영하여 언론은 열사의 죽음을 앞 다퉈 취재하고 사회여론화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 박일수 열사 개인의 치열했던 삶, 무법천지인 현대공화국’ 등이 중앙과 지역방송, 신문 등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마침내 현대중공업 현장에서부터 인간선언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월24일 조광한, 진용기 두 동지의 공개조합원 선언은 단순한 노동조합 활동결의가 아니었다. 무법천지 중공업 현장에서 공개조합원 선언이란 사실상 해고를 감수하는 결단이며, 심지어 각종 형태의 테러까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과감한 행동이다. 따라서 수백 명의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공개를 꺼리고 있으며, 현중자본은 이로써 그 동안 하청노조를 외부단체, 해고자 집단 등으로 매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광한, 진용기 동지의 경우 이런 자본의 탄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열사가 난 마당에 더 이상 노예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중공업 현장의 처참한 현실을 알리고 동료 작업자가 겪었던 고통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결국 두 동지들은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전체 현중 하청노동자의 눈물이자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눈물이다.
공개조합원 동지들의 인간선언은 그 자체로 열사투쟁의 정당함과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필요성을 알렸다. 또한 아직도 침묵하고 있는 현장의 수많은 하청노동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인식되어 향후 현장에서 하청노동자를 조직하는 발판이 되었다. 공개조합원 동지들은 현중자본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출입을 금지시키고, 업체가 재계약을 거부하고, 산재신청이 이유 없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악조건에서도 쉬지 않고 열사투쟁과 현장조직 사업을 지속했다. 이 결과 김태형, 박규용 동지의 공개조합원 선언을 이끌었으며, 이후 소지공(파워그라인더) 동지들의 자발적인 임금삭감 저지투쟁을 하청노조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물론 공개조합원 활동을 비롯해 지금과 같은 형태의 모든 현장투쟁의 길을 터 준 것은 분명 열사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공개조합원 동지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열사의 뜻이 현장 대중에게까지 전달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개조합원 활동은 이번 열사투쟁에서 간과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 투쟁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하청노조 천막농성 투쟁과 현중 경비대의 테러
2월25일 영남노동자대회는 열사투쟁 시작 이후 울산지역을 넘어 개최되는 최초의 전국집회였다. 이 자리에 참가한 동지들은 현중 전하문 앞에서 전경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등 응축되었던 분노를 표현했다. 또한 집회가 끝난 후 중공업 자본을 항시 압박하고 계급적 연대를 일상화하기 위해 중공업 정문 앞에 천막을 설치했다.
또한 이는 열사투쟁의 거점 범위를 영안실 주변으로만 한정하고, 지역과 전국 동지들에게 보다 긴장감 있고 결의된 투쟁의지를 촉구하길 꺼려하는 대책위에 대한 항의이자 최초의 독립적 행동이었다. 실제 천막 설치 이후 지역과 전국의 연대단위 동지들은 영안실과 함께 천막 방문을 통해 대책위와는 사뭇 다른 하청노조의 투쟁의지를 확인했고, 이 자리에서 더욱 책임 있게 연대할 것을 결의하고 돌아갔다.
다른 무엇보다 공장 정문 앞이라는 지리적 조건 상 현중 노동자들이 출퇴근 시간마다 열사투쟁의 의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자본에게는 이것이 목에 가시처럼 인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본은 호시탐탐 천막철거를 노렸고 마침내 2월28일 지역집회를 마치고 공장진입을 감행한 시위대를 공장에서 몰아낸다는 명분과 함께 천막을 폭력으로 철거했다.
중공업 사장이 직접 진두지휘하고 경비들과 관리자들이 총동원된 진압 및 철거작전은 그야말로 살벌했으며, 천막 안에는 갓난아기 및 어린이를 비롯해 여성 암환자 등이 있었음에도 소화기, 쇠파이프 등으로 중무장한 경비대는 ‘다 죽어도 상관없다’, 아니 ‘다 죽이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테러를 자행했다. 이른바 2.28 테러행위는 이전부터 있어왔던 현중 경비대 폭력의 결정판이자, 열사투쟁의 전 과정에서 자행될 폭력의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경찰서장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전경마저 폭행하는 현중자본의 위력을 보며 과연 무법천지 현대공화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는 점을 실감시켜준 사건이었다.
현중 어용노조의 만행과 대책위의 타협
하청노조가 독립적으로 천막을 설치한 이유 중 하나는 대책위가 처음부터 투쟁을 제한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레인 점거농성, 공개조합원 활동, 천막농성 등으로 보여준 비타협적인 투쟁의지 때문에 대책위는 노골적으로 투쟁회피를 표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위의 투쟁회피는 어용노조에 대한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열사를 음해하고, 유족을 납치하는 등 노동조합으로선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던 현중노조는 급기야 대의원들을 총동원해 영안실을 난입하기 시작했다. 어용대의원들 중에는 한때 민주노조운동가도 있었고 심지어 골리앗 전사들도 있었다. 하물며 탁학수 현 위원장을 비롯해 일부 집행간부도 한때 민주노조운동의 주도세력에 속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현중자본의 치밀한 현장통제와 개별적 관리, 회유와 협박,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의 무기력 등이 수년간 반복되면서 결국 자본의 하수인이 되고 만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변절을 확실히 증명하기라도 하듯 앞장서서 미친개들처럼 폭력을 휘두르고 유족을 협박했다. 이에 분노한 하청노조와 지역의 동지들이 비록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결연한 의지로 대의원들을 힘겹게 막아내고 최소한 분향실만은 지키자는 자세로 매일매일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다. 대책위가 자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현중 어용노조를 교섭주체로 인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를 확인하자마자 하청노조와 지역동지들은 급하게 자체 대책회의를 진행했고, 이헌구 대책위원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격한 논쟁이 오갔다. 그러나 이헌구 대책위원장은 ‘우리에겐 힘이 없다’, ‘할 수 있으면 동지들끼리 해봐라’는 식으로 하청노조와 지역 동지들을 가지고 놀았다. 하청노조와 지역 동지들이 서명까지 해가며 대책위 결정을 번복해 줄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위는 형식적인 민주적 절차를 들먹이며 이런 의견을 묵살했다. 3월9일, 마침내 하청노조 동지들을 중심으로 많은 동지들이 대책위의 최종결정에 항의해 영안실 복도를 점거, 연좌농성을 벌이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때부터 대책위는 하청노조와 지역 동지들의 투쟁요구는 완전히 무시하고 자본 및 어용노조와의 교섭에만 집착하는 행태를 노골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공장 민주파 활동가들의 무기력
민주노조운동의 퇴락은 민주노총 상층 지도부나 지역관료들에게서 보다 현장에 숨어 있는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로부터 찾아져야 한다. 민주노총의 전반적 후퇴는 바로 이들 민주파 현장활동가들의 몰락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중에서 민주파 활동가들이라 칭해질 수 있는 소위 ‘분과동지회 연합’ 등은 이번에 ‘현중현장대책위’라는 이름으로 열사투쟁에 결합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이 현중 현장에서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투쟁조차 회피하고 조직보신주의로 일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자신들이 유인물을 통해 폭로한 ‘류재순씨 산재사망 사고’와 ‘어용대의원의 조합비 유용사건’이 현장조합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어용노조로부터의 탄압 빌미가 되자 비굴하게도 이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사실상 열사투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다. 이미 전국적인 캠페인이 된지 오래고 금속연맹 중앙위 결정사항인 ‘어용노조 제명’ 요구조차 현중 민주파 활동가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로 인식되어 공식적인 입장 한번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외곽에서 하청노조의 유인물 돌려주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인 양 생색을 내고 이조차 열사투쟁의 후반부로 갈수록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열사투쟁은 이들에게 향후 중공업 운동을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을 또 한번 확인시켰고, 어용노조 타도는 민주파의 재집권이 아닌, 소수지만 전투적인 인자들이 주도하는 현장투쟁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함을 증명했다.
무쟁의 10년인 현중의 상황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 열사투쟁에서 대공장 노조 또는 활동가들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지역이든 전국 집회든 참여한 단위는 대부분 현자와 미포 용인기업, 울산건설플랜트 등 비정규직 단위와 효성 및 현중 해복투 등 해고자들이며, 오히려 가장 참여하기 어려운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공장의 경우 개인으로 또는 집행간부 몇 명이 참여해 겨우 깃발이나 움켜쥐고 있었다.
같은 지역의 현대차 노조의 현장조직 활동가들 역시 이번 열사투쟁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상욱 위원장은 난데없이 프랑스로 출장을 갔고, 현장 제조직은 성명서 한 장 발표한 것으로 입을 닦았다. 울산 본부장이 영안실에서 연행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현대차 노조는 부분파업조차 결의하지 못하고 간부파업으로 때웠다. 겉으론 현대차 노조가 아직 살아있고 그래도 민주파가 연합하면 어용의 집권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할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다간 현중 이상으로 어용의 굴레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 때가서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민주노조의 현장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지역과 전국의 투사들을 결집하라!! - 열사정신계승 투쟁선봉대
대책위가 투쟁의 방향을 자본 및 어용노조와의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교섭으로 이끌고, 하청노조와 지역동지들의 투쟁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가장 확실히 증명된 사건은 바로 3월13일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애초에 중전기 공장 정문 앞에서 개최되기로 했던 노동자대회는 ‘자본과의 조건 없는 교섭 수용, 즉 어용노조의 교섭주체 인정’ 결정이 내려진 대책위 회의가 있던 날 급박하게 일산해수욕장으로 바뀌어버렸다. 공장문을 바라보며 현중자본에 대한 적개심과 현장진입투쟁에 대한 결의를 다질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의도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더욱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대책위 차원의 ‘질서유지대’ 50여명이 행진도중 거치게 되는 전하문 앞을 떡하니 막고 서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질서유지대가 동지가 아닌 적이었으며, 명백히 경비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날 질서유지대로 동원되었던 자들은 아마도 평생 자신의 몰지각한 행동을 반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13일 노동자대회에서 너무나 치욕적인 경험을 한 하청노조와 지역, 그리고 전국의 동지들은 더 이상 대책위를 믿을 수 없으며 독립적인 투쟁 단위를 구성해서 행동해야 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서 하청노조는 ‘열사정신계승 투쟁선봉대’를 전국과 지역의 동지들에게 제안했다. 아울러 ‘현중현장조직대책위’라는 형태로 묶여 있는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 중에 진심으로 투쟁하고자하는 동지들에게 ‘현중직영선봉대’를 제안했다. 이를 조직하기 위해 하청노조 동지들은 조를 나눠 울산지역은 물론 전국을 순회했고, 비록 당장에는 성과가 없을 지라도 최대한 자기 지역에서, 또한 전국적인 집회에서 열사정신에 따라 투쟁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3월 27일 ‘영호남 노동자대회’에서 선봉대는 최초의 독립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이날 역시 대책위는 집회장소를 남목으로 잡아놓고, 행진은 아예 공장 건너편 도로를 따라 하도록 기획해 놓고 있었다. 선봉대 동지들은 이런 평화적인 행진을 또 다시 수용한다면 이후 열사투쟁을 살려낼 수 없다는 위기감 속에서 과감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플래카드로 전차선을 틀어막은 후 공장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전경들을 향해 페인트와 계란 등을 투척했다. 대책위 간부들은 갑작스런 돌발사태에 당황하여 신경질을 내더니 급기야 대오를 그대로 놔두고 집회해산을 선언한 채 영안실로 복귀해버렸다. 공장문 앞에서 전경과 대치 중이던 선봉대와 소수의 집회참가 동지들은 몸싸움을 계속하다 간단한 자체 정리집회를 한 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에서는 이날의 사건에 대해 분열책동이라 비판했고, 일부에서는 초라한 저항이었다고 의미를 깎아 내렸지만 실제 투쟁을 준비하고 실행한 선봉대와 투쟁동지들에게는 열사투쟁의 정신을 다시 한번 자각하고 이후 투쟁 역시 기회주의적 대책위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하청노조가 중심에서 지역과 전국의 투쟁하려는 동지들과 함께 해야 할 것임을 결의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 날의 투쟁이 없었다면 아마도 하청노조와 지역 동지들은 ‘대안 없이 떠드는 세력’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실제 누가 행동하는 투쟁주체들인가를 확인할 계기도 없었을 것이다.
3.27 투쟁이후 비록 이 날 만큼의 독립적 행동은 아니지만 열사투쟁의 후반부에서 선봉대는 분명 하청노조 투쟁에 힘을 실어주고 대책위를 압박하는 역할을 해냈다. 관료들에 맞선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의 결집과 독자행동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선봉대는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대책위의 배신과 기만적인 합의안
3월28일 새벽 동부서 형사 50여명이 영안실로 난입하여 이헌구 대책위 위원장, 조성웅 하청노조 위원장, 김주익 조합원을 연행해갔다. 당시 영안실에는 10여명의 동지들이 있었지만 폭력연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들은 폭력으로라도 투쟁지도부를 연행함으로써 이 투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들의 행위는 오히려 하청노조와 지역동지들의 분노만을 자극했다. 대책위와 지역동지들은 그 날로 동부서 항의를 조직했고, 하청노조 동지들은 폭력연행에 항의하는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공개조합원인 김태형 동지는 3보1배를 통해 열사에 대한 죄를 씻고 자기희생을 통한 투쟁의지를 밝혔다. 또한 경비대의 감시와 경찰의 수배상태라는 어려운 조건에서 직무대행을 맡게 된 이승열 사무장은 하청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고취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는 결의를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영안실 현관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한편 대책위는 이제껏 투쟁회피적인 태도를 일시적이나마 버리고 사수대 재강화, 지역집회 총력조직, 소속 사업장 부분파업 등을 결의했다. 지도부 구속을 계기로 일시적인 고양국면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고양기를 이용해 김효철 동지가 기습적인 중식선동을 진행했다. 경비대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현장에 잠입해 열사의 정신과 지도부 연행의 부당함을 선동하고 유유히 공장을 빠져나왔다. 발각되면 무참한 폭력은 물론 연행까지 각오해야 할 행동이었지만 김효철 동지는 수백 명의 경비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당당히 노동자의 기개를 현장에서 펼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효철 동지와 하청노조 동지들에 대한 감시와 협박은 거의 살해위협으로까지 발전했지만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는 하청노조 동지들에게는 귀찮은 파리떼에 불과했다.
오히려 하청노조 동지들은 투쟁의 확대를 꾀했고, 주말을 이용해 장인권 대책위직무대행이 약속한 ‘5월1일 울산 노동절’을 조직하기 위해 서울과 수도권을 순회했다. 총선국면이 시작되었지만 열사투쟁은 흔들림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시점까지 예상할 수은 없었지만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견되었던 사건이 현장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바로 소지공(파워그라인더)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임금삭감을 당한 소지공 노동자들은 이번만큼은 시급제전환을 빌미로 한 임금삭감에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의지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미 지난 투쟁의 경험을 통해 이것이 소지공만의 투쟁이 되면 또 다시 자본의 각개격파에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청노조의 지원을 요청했다. 과거 열사투쟁 이전에는 유약한 것으로만 보였던 하청노조가 현중자본에 맞서 50여일 동안 당당히 투쟁하고 전국 노동자계급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믿음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파업으로까지 발전할 소지가 있었던 소지공 투쟁이 열사투쟁과 결합하기만 하면 현중자본은 더욱 더 궁지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배신은 항상 결정적인 국면에서 자행되기 마련이다. 열사투쟁이 소지공 투쟁 등과 결합하여 대대적인 현장투쟁으로 발전하려는 순간 대책위 지도부는 검사의 중재 하에 현중자본과의 교섭에 착수했다. 4월6일 실무교섭이 시작되자마자 당일 저녁에 잠정합의안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합의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부끄러운 공문구들이었다. 하청노조 활동을 보장할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이 그저 “회사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출입을 허용한다는 식이었다. 또한 해고자 복직의 경우도 공개조합원의 원상회복을 제외하고는 이면합의 형태로 처리되고, 이조차 전원복직은커녕 사실 2명 정도의 선별복직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합의안에 대해 하청노조 동지들이 동의할 수 있겠는가? 지역 동지들이 지지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하청노조는 이 합의안이 허구적이고 기만적이라는 것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았고, 지역동지들과 함께 대책위 지도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장인권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대책위 간부들은 “잠정합의안은 수정될 수 없다”, “통과 안 되면 사퇴하겠다”는 식으로 하청노조와 지역동지들을 협박하고 결국 하청노조를 제외한 다른 대책위원들의 만장일치 박수로 이 안을 통과시켰다. 거수 자체를 막고 대책위 회의를 폭력으로라도 중단시켜야 한다는 견해가 하청노조와 지역 동지들 중 일부에서 나왔지만 소수의 견해로 취급되고 결국 “대책위 합의안에 반대하지만 결정에 승복한다”는 애매한 입장으로 잠정합의안은 통과되고 만 것이다.
비타협적 투쟁만이 열사의 뜻이다
실질적인 힘의 부족으로 결국 대책위의 기만적 합의안 통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하청노조 동지들 사이에서 이대로 투쟁을 접을 수 없다는 의지가 뒤늦게나마 살아나기 시작했다. 자본과의 교섭실권을 갖고 있는 대책위와는 독립적으로 노숙농성을 계속 이어가며 투쟁을 계속하려는 행동이 몇몇 하청노조 동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에게는 ‘분열주의자, 개별적 행동’이라는 오명이 쏟아졌고, 심지어 하청노조 내부에서도 노숙농성은 자본을 자극하고 합의안 불이행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접어야 한다는 견해가 다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반면 이들은 기만적인 합의조차 이행되기 위해서는 하청노조의 투쟁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거듭 설득했지만 결국 하청노조 전체의 의견으로 모아지지는 못했다. 이런 와중에 경비대에 의해 하청노조 노숙농성장이 쑥대밭이 되고, 방송차 앞 유리가 박살나고, 스피커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명백히 하청노조 동지들의 투쟁을 탄압한 테러사건임에도 오히려 “방송차 다 박살나고 물품 다 뺏길 때까지 계속할 거냐?”는 비아냥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역 관료들은 왜 하청노조가 단결하지 못하냐는 식으로 계속해서 하청노조내의 전투적 행동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청노조의 집단적 결정에 따라 장례식 당일날까지만 노숙농성을 지속한 후, 이후 합의안이 안 지켜지거나 또 다른 현장탄압이 발생할 경우 다시 투쟁한다는 결의 하에 노숙농성장은 자진철수 되었다.
물론 이런 타협을 정당화해선 안된다. 특히 끝까지 노숙농성장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던 몇몇 전투적 동지들의 타협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렇다, 누군가 말하듯 그것은 ‘나약한 굴종’이었다. 결국 열사를 두 번 죽인 죄인이 된 하청노조 동지들은 이후 적지 않은 기간동안 패배감과 죄책감에 빠져 정신적 공황상태를 경험해야 했다.
현중 자본의 악랄함은 또 다시 투쟁으로 하청노조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러나 하청노조 동지들은 결코 나약한 인자들이 아니며,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하청노조 동지들은 벌써 몇 년 전부터 현중자본의 현장 탄압과 경비대의 폭력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매일매일 해왔고, 해고로 생계가 끊긴지 오래지만 하청노조 사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분투해왔다. 채 10여명이 안되는 하청노조 활동 조합원들이 현중자본과 어용노조, 관료들에 맞서 열사투쟁을 지켜내고자 이를 악물고 싸워 왔고, 그 과정에서 구속, 수배, 테러, 가정파탄, 정신질환 등등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악전고투 끝에 패배했기 때문에 더욱 안쓰럽고 죄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 패배감으로부터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중 하청노조 동지들이 일시적 침체를 보인다고 해서 결코 하청노조 동지들의 불굴의 투쟁의지가 꺾인 것이 아님을 동지들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다. 이미 현중 자본이 그것을 잘 알고 ‘합의안 불이행’부터 시작하여 하청노조에 대한 탄압을 다시 시작했다. 현중 자본이 두려워하는 것은 현재로선 하청노조 밖에 없다.
하청노조 동지들의 투쟁의지, 투쟁력은 빠른 시일 안에 반드시 복원될 것이다. 이제 막 조합에 가입하여 현장투쟁의 방향과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습득해야 할 소지공 조합원 동지들을 비롯해 연일 불어나고 있는 하청노동자들의 지지와 관심에 화답하기 위해서라도 하청노조 동지들의 투쟁의지는 새롭게 다져질 것이다. 하청노조 동지들이 또 한번 투쟁을 다짐하고 일어서는 순간, 현대중공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는 다시 한번 정확히 판명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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