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선거를 여는 사람들의 총선이야기 Another0415
탄핵반대의 민주주의 열풍을 넘어 노동자권력으로 전진하자!
사노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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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4월 14일 16시 54분 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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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반대의 민주주의 열풍을 넘어 노동자권력으로 전진하자!
- 노무현 탄핵과 촛불집회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3월 12일 탄핵가결 이후 전국을 휩쓴 촛불집회는 20일 30여 만명의 인파를 광화문에 결집시키며 절정에 올랐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안이 가진 무게감과 그에 따른 대중적 분노의 표출은 민주노조 운동 역시 무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짧은 시간 내에 탄핵과 촛불집회를 둘러싼 무수한 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로 발현된 대중의 행동에 압도됐다. 부르주아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좌파들 역시 그 속에서 새로운 운동을 보았다. 그러나 촛불집회로 모인 대중들은 3월 27일을 마지막으로 흩어졌고, 정세는 4월에 들어 총선국면으로 급선회했다.


촛불집회, 새로운 대중운동인가?

탄핵사태 이후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주류운동이 보인 태도는 탄핵반대라는 기치아래 결집한 대중의 분노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총선국면의 본격화와 함께 선거운동으로 매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기회주의적 입장과 거리를 두는 좌파 일각에서는 촛불집회로 나타난 대중운동의 자발성에 주목하며 이를 급진화시켜야 한다는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국민(민중)발의제/국민(민중)소환제” 등이 그 대표적인 주장이다.
노동자 집회가 대단히 관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얼마 모이지 않는 현실에서 탄핵반대 촛불집회의 거대한 규모와 자발성은 좌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탄핵정국을 과대평가하고 ‘대중’에 대한 계급분석이 없다는 면에서 주류운동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유물론적 분석에서 ‘대중’ 일반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 속에는 항시 계급적 이해관계가 깔려있다. 계급분석 없이 대중 ‘자체’를 급진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추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나고 있는 계급분석은 탄핵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소부르주아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반대로 탄핵반대 운동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와 지지를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분석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현실을 꿰다 맞추려는 주관적인 분석에 불과하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대중은 진보적 부르주아, 하층민중, 프롤레타리아트, 반프롤레타리아트를 망라하고 있으며, 이를 단순히 소부르주아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문제는 ‘수구/개혁’의 전선 속에서 그들 일반의 의식이 민주주의적 의식, 건전한 시민의 의식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많다고 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후진 노동자들의 의식에 영합하는 것은 꽁무니주의일 뿐이다.
이러한 대중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민주노동당은 그 속에서 노동자운동을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꽁무니에 갖다 붙이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계급적 본질을 보다 명백하게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탄핵국면 속에서 열우당의 뒷꽁무니를 핥는 민주노동당의 꽁무니를 다른 좌파들 역시 이리저리 쫓아 다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 전선으로 해소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전선을 밝히고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대중 일반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전선을 분명히 밝히고 그것으로 결합하도록 선전 선동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혁명인가? 사회주의 혁명인가?

탄핵과 촛불집회는 87년의 호헌선언과 6월 항쟁을 재연하고 있다. 다만 민중 대신에 시민이, 화염병 대신에 촛불이, 전두환 노태우 대신에 최병렬과 조순형이, 직선제 대신에 탄핵무효가, 임시혁명정부와 제헌의회 대신 국민소환과 발의제가 외쳐지고 있을 뿐이다. 유시민 임종석과 같은 87년 거리의 투사들, 가두 민주주의 투사들이 말그대로 의회 민주주의 투사가 되어 전경과 백골단이 아니라 국회 경위대와 한나라당 국회의원들과 싸우는 모습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희극적 반복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남한에서 민주주의 투쟁이 혁명성과 전투성을 띄던 시기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투쟁으로서 탄핵반대 운동은 반체제적 성격으로 발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열렬히 갈구했던 좌파들의 주관적 바램과는 달리 그렇게 나타날 가능성도 없었다. 왜냐하면 남한에서 민주주의적 과제는 더 이상 혁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87년 이후 90년대 초반 진행되어온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전선의 해체가 완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87년 6월 항쟁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전선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의 체제 내 편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YS와 DJ의 꽁무니로 들어간 이들 세력은 노무현의 집권과 함께 비로소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들이 기존 정치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수구 대 개혁, 민주 대 반민주”라는 낡은 구호를 무기로 대중을 결집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전선의 해체 속에서 시민사회운동이라는 형태로 분화한 세력들은 김대중 집권 이후 준관변단체로 변해왔다. 이들의 주도아래 촛불집회는 관제시위적 성격을 띄었고 철저히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깃발을 들고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분적인 예에 불과하다. 이렇게 현재의 탄핵반대 운동이 부르주아 체제 내부의 재편과정, 386이라 불리는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 세대의 권력화 과정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은 프랑스 68년 운동과 같은 반체제적 운동이 아니라 체제 내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당면 과제가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칭 사회주의자는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의식화와 자각이 필요하다. 생산관계 속이 계급에서 스스로의 역사적 임무와 사명을 자기의식한 혁명적 주체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탄핵반대, 민주주의 수호”의 열풍 속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으로서 결집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으로 용해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을 소부르주아 운동의 꼬리로 종속시키고 그들의 의식을 부르주아 시민의식으로 한정하는 것은 반동일 뿐이다.


민주주의 전선을 노동자계급의 전선으로!

노힘의 원영수 씨는 탄핵에 대한 계급의 대안은 비록 잊혀지고 있지만 “혁명이라는 단어 자체”일 뿐이라고 말한다. 거칠지만 옳은 말이다. 하지만 노힘과 그 주변에서 제기되고 있는 있는 민중탄핵론은 현재의 정세와 전선의 성격을 보지 못하고, 무언가 발언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무능력이 빚어낸 좌익공론일 뿐이다.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 “대중전취의 논리”로 조합주의를 추수해 온 평소 노힘의 정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차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동이니, 그 운동 전체에 “소부르주아”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그야말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라는 논리에 불과하다.
특히 채만수 씨는 “하일(Heil) 노무현을 저지해야”라는 글에서 노무현과 탄핵반대 운동에 대해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의 태동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수사학적인 것이라고 해도 노무현을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당을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일부의 좌파보다 훨씬 큰 비약이다. 그리고 ‘노사모’를 노무현 유겐트(나찌의 청년 선봉대)라고 하면서 탄핵반대 운동에 참여한 대중들을 파시스트들의 선동에 의해 모인 우매한 대중으로 매도하는 것은 스탈린의 ‘사회파시즘론’과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많은 좌파들이 ‘좌익소아병’을 들먹이며 대중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노힘이나 채만수 씨의 입장은 대중을 바리케이트 저편으로 돌려버리고 노동자계급을 고립시키는 위험한 태도다. 그러나 문제는 무조건 동참해야 한다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목적으로 할 것인가다. 대중운동 일반에 대한 추수가 아니라, 대중으로부터 계급의 이해를 갈라치고, 계급을 결집시켜야 한다. 이러한 결집으로부터 부르주아의 영향력으로부터 소부르주아 하층을 떼어내고 자신의 주변으로 모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와 투쟁전선은 무엇으로부터 형성되고 있는가? 최근 울산에서 벌어진 열사투쟁, 이주투쟁 등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DJ 정권 하반기부터,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노동운동탄압, 민주노조 말살전략에 대한 투쟁전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작년 10, 11월 노동자들을 연이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동자들의 현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자본과 정권의 노동운동탄압, 민주노조 말살전략은 중소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으며, 대공장에 있어서도 노조의 장악력을 밑으로부터 붕괴시키고 있다.
이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은 급속하게 붕괴하고 있다. 현중에서 나타나듯 현장에서는 노사협조주의자들 마저 몰락하고 있다. 자본은 그 빈틈을 통해 어용을 내세워 현장을 직접 장악해 들어오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전선과 무관하게 87년 이후 10년이 넘는 투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노조 운동의 기본권이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운동탄압과 노조무력화에 있어 지배계급의 태도는 완전히 동일하다. 이에 따라 현재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이러한 자본의 공세에 대한 방어전 전선 - “노동운동 탄압 분쇄, 비정규직철폐, 민주노조 사수와 복원”이라는 전선으로 형성되고 있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3월 13일부터 3월 말까지 울산의 열사투쟁과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투쟁들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탄핵소동 속에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3월 27일 서울 촛불집회에 수만명이 모인 반면 울산에서 벌어진 영남노동자대회는 겨우 몇 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초라하게 치루어 졌다. 바로 다음날 새벽 대책위 간부와 하청노조 위원장 등이 영안실을 급습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며칠 후인 4월 1일 이주노동자 투쟁을 이끌어오던 평등노조 이주지부 지부장 샤말 타파 동지가 강제추방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주의 놀음과 노동자계급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진노동자의 임무는 민주주의 운동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다. 개별화되고 있는 이러한 투쟁들을 강화하고 전계급적 전선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대중 속으로 계급의 슬로건을 보급하는 것이 선진노동자와 사회주의자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3월 27일 서울에서도 열사정신 계승, 비정규직 철폐를 내건 집회가 개최되었다. 노동자계급의 태도는 광화문에 운집한 대중들에게 노무현 정권의 노동운동탄압을 폭로하고, 선전선동해야 했으나. 집회대오는 깃발을 내리고 촛불집회로 용해되고 말았다. 우리에겐 민주주의 운동을 따라다니는 개별적인 노동자가 아닌, 계급의 입장을 가지고 폭로와 선동을 수행할 선진노동자들의 결집된 부대가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정치는 노동자투쟁 속에 있다.

부르주아 언론은 대안을 본다. 거기에 새로운 정치질서의 맹아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는 부르주아 정치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투쟁 속에서만 그 싹이 형성될 수 있다. 진정으로 새로운 정치는 자본주의 국가장치를 분쇄하고 그것을 대체할 노동자권력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계급 독재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권력으로 가는 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것에 결코 있지 않다. 현재 탄핵사태로 빚어진 일시적인 “개혁 대 수구,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진정한 대안은 노동자권력에 있음을 선전하는 것, 그리고 현재의 계급투쟁 전선을 강화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전투적 사회주의 노동자의 새로운 층이 창출될 때 노동자권력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더 빨라질 것이다.


2004년 4월 14일

새로운 계급주체들의 네트워크 <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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