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학생연대회의 게시판에서 퍼옵니다. 먼저 어떤 다함께 활동가의 '국민발의/소환' 입장에 대한 비판이 있고, 그 다음에 국민발의/소환 입장에서 어떤 활동가(저는 아닙니다)의 반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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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다함께 활동가
'국민소환제 발의론'에 대한 반론
운동 일각의 동지들이 주장하는 국민소환제 발의론은 그 논리 안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물론 나는 원칙적으로 국민소환제를 지지한다. 국민소환제의 실시는 분명 하나의 진보이며 민중들이 이것을 원할 때 분명 나 역시 이 것을 지지할 것이며 나아가 앞장 서서 싸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세에서 그것을 주장할 것인가의 문제는 원칙을 넘어, 크게는 전술의 문제가 된다.
1. 잘못된 정세 분석 - 민중들의 급진화 정도
국민소환제론의 정세 분석 전제는 민중들이 국회의 파산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민중들이 국회의 파산을 선고했는가? 민중들이 말하는 국회 파산은 한민당에 대한 실망과 공격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 의회 정치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같은 단어라고 해도 그 속은 다른 뜻을 가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민중들이 국회를 공격하고 있는지는 국민소환제론을 가지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과 토론을 시작했을 때 부딪힐 벽이 증명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지금 수많은 지역에서 열우당과 민노당의 지지율이 급등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민중들이 의회정치의 파산을 선고했다면 왜 이들의 지지율이 올라가는가? 이것은 당연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국회에 대한 심판을 여전히 총선이라는 의회정치적 방법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2. 국민소환제가 진정한 대안인가?
실제로 민중들이 의회정치의 한계를 알고있고 여기에 분노하고 있다고 가정하자.그렇다면 이 의회정치의 한계는 국민소환제로 극복될 수 있는가? 국민소환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의회정치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도구일 뿐이지,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정치적 기제가 될 수 없다. 일례로 국민소환제가 도입되어 실행되고 있는 어떤 '선진 정치 국가'도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 정치를 수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또한 그러한 정치를 막을 수 있는 일상적인 형태의, 마치 수시로 대표를 소환할 수 있는 소비에트 체제에서와 같은 소환제는 현재 어떤 나라에서도 시행된 바 없다. 그러한 형식의 '소환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국가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의회 정치 자체가 한계이므로 이것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 탄핵국면 초기의 연대회의 동지들의 입장과 지금 그 의회 정치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국민소환제의 본질은 상충한다. 이것은 평소 민주노동당을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대안에 있어서는 케인즈주의와 유사한 불분명한 이야기들[다분히 사민주의적인]을 하는 그들의 모호성과 맥락이 닿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모호성은 알튀세르/발리바르에 입각한 중층모순 이론에 따르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도 추측되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소위 '경제문제'만 해결해줄 수 있을 사회주의 혁명은 완벽한 이 사회의 대안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국민소환제 발의론의 모순은 사실상 연대회의 동지들이, 정말로 -다른 의미 없이- 다행스럽게도, 여러 압력으로 인해 결국 이 운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막대기를 덜 구부려 발생한 전술적 오류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국민소환제를 위한 국민투표?
또한 국민소환제를 실시하기 위해 국민투표제를 실시하자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이것은 대중들로 하여금 파업, 동맹 휴학등의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거대하게 조직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투표라는 방법으로 대중의 행동을 수동화시키고 있다. 의식의 급진화는 경험에서 나오며, 이 경험은 대중 행동에서 나온다. 게다가,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해서라도 엄청난 대중적 압력이 필요하다. 국민소환제를 지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인가를 논외로 한다면, 여기에 동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더 쏟아져나오고 파업을 조직해야만 한다. 그럴 때 소환제를 위한 국민투표도 실시할 수 있다. 따라서 탄핵 운동이 더 커지고 그 안에서 국민소환제 주장이 큰 호응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연대회의 동지들은 지금 탄핵 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지 않고 있다. 탄핵 반대 운동의 성장 없이 국민소환제 운동도 없다. 대중의 의식이 좌파들의 입맛대로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하지는 않는다.
4. 대안, 급진화, 그리고 총선
연대회의 동지들은 국민소환제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총선 문제에 있어서도 모호해져버린다. 의회정치 자체가 문제인데, 게다가 국민소환제도 없는 국회인데, 그렇다면 연대회의 동지들은 총선 정국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여기서 적지않은 연대회의 동지들이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총선에 개입해 아직 열우당이나 민노당이 이 사회의 진정한 대안이라고 믿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원칙이 열우당과 민노당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혁명적 순수성 자체를 위해 순수성을 고취시키는 것은 좌파를 대중과 분리시키는 일일 뿐이다. 사람들의 의식의 급진화는 어떤 계기 안에서 경험을 통해 발전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입하고 토론하고 우리의 정치가 대중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운동 안에서, 실천으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 유인물과 대자보에 있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리들로 사람들이 설득되고 이들이 행동으로 나설 수 있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왜 20년이 넘는 과정이 걸렸겠는가? 실천으로 드러내기 위해 대중이 환상을 품는다면 기꺼이 그것에 함께하는 것은 결코 대중추수주의도, 개량주의도 아니다. 1905년, 러시아의 '어린 아버지'에게 가퐁 신부를 앞세워 '호소'하러 갔던 노동자들은 이내 급진화되어 10월에 소비에트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1903년 당건설 논쟁에 여전히 갇혀있던 볼셰비키들이 당의 문호를 계속 개방하지 않았다면, 결코 볼셰비키는 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선진적 의식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입증하는 과정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총선에서 탄핵을 방어하고자 열우당으로, 즉 한나라당에서 조금 왼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에게 민주노동당이 열우당과 다른 정당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민노당 지지자들을 포함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민노당에 투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대중행동이라는 대안이 필요함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남으로써 그들과 연관 맺고 계속적으로 그들은 운동으로 연루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관맺음을 통한 계속적 급진화, 입증의 과정은 지금 당장 탄핵 국면에서부터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탄핵반대를 주장하고, 이 운동에 뛰어들고, 그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지금 이 운동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려는 오른쪽에 있는 지도부들에 맞서 우리의 주장을 해야한다. 우리의 주장은 바로 더 넓고 강력한 대중행동을 통해 이 국면에서 당장 한민련을 끝장내고 노무현 또한 우리의 손아귀에 둠으로써, 그 작자를 빠른 시일내에 대중의 입증을 통해 대중의 손에 의해 끝장내버릴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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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그냥활동가 (국민발의/소환 입장)
다함께 비판에 대한 반비판
#1. 대중이데올로기 지형-과연 한민당비판, 노무현지지인가?
>>>이 논리의 핵심은, 요컨대 대중이데올로기는 딱 ‘한민당
비판’까지라는 것이다. 한민당 비판, 열우당과 민노당은 지지. 이것이
현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대중이데올로기인가? 뭔가 한참 착각하고 있다.
한민당에 대한 비판, 한민당이 날치기통과시켰던 탄핵에 대한 반대가
대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배정치
일반에 대한 환멸과 분노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다.
위의 논리대로라면 열우당과 민노당이 대중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말인데, 과연 대중지형이 그런한가? 열우당에 대한
지지는 지배정치에 대한 환멸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탄핵반대’라는
상징을 통해 드러난 것 뿐이다. 왜냐하면 다른 대안이나 상징이 없기
때문에. 또한 민노당은 지배정치에 대당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탄핵 국면 속에서 민노당은 논란꺼리도 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논리는 대중들의 지지율 그 자체를 이데올로기
지형으로 인식하는 극심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2. 국민소환제와 발의제는 인민의 지배, 민중적 통제를 실현하는
기제로서 사고해야 한다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의제는 의회정치의 한계 속에 존재한다는 비판.
그런데 의회정치는 왜 문제인가? 그것이 대의제의 형태를 띄고
있어서인가? 국민발의제와 소환제를 직접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 구도로
바라보는 것은 이 논의 자체를 지배정치의 틀 속에 가둘 위험이 있다.
의회정치는 ‘부르주아 의회정치’의 맥락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의회라는
형태 ―간접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라면 우리는 지금 제 정치적 공동체를
모조리 해체하고 소공동체(꼬뮌)를 형성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자율주의(꼬뮌주의)에 관한 논란은 논외(論外)로 하고서, 다시 부르주아
의회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것은 기본적으로 정치/경제 권력은
모두 부르주아들이 장악하고 있고 의회에서는 그에 부응하는 결정들만
이루어진다. 개별부르주아의 이익에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전체
부르주아지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이 거의 전부다. 그 가운데 민중들의
삶에 대한 논의는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것이 첨예하게
제기되는 시점에서도 민중들의 삶에 반하는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민중들의 통제는 불가하다. 통제의 방식이라고는 4년에 한
번꼴로 이루어지는 선거가 고작이지만, 그것도 여하한 적극적 의사개진은
불가능하다. 이미 정해진 후보로 자신의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으며
투표용지를 넘어서는 의사표명은 불가능하다.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의제는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의회정치의 보완물로서가
아니라, ‘민중들의 통제권’을 실현하는 보충물인 것이다. 그것 역시
자본주의 사회, 부르주아 의회정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 라고
비난한다면 할 말 없다. 우리도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의제를 통해서
혁명하고 부르주아 의회를 타파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투쟁과 봉기로써 가능한
것이지, 제도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기
국민소환제와 국민발의제가 중요하게 제기되는 맥락은 이것이 현재
국면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기매김할 수 있다는
점이다.지배정치에 대한 정치적환멸과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은
현시기 ‘탄핵반대’라는 슬로로 협소화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삶에
대한 의제(agenda)를 던지고 민중적 통제권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참고로, 국민소환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발의제이다.)
그리고 민노당에 대한 비판,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한 언급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민노당을 비판할
때 드는 여러 가지 근거들을 ‘개량’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사민주의적 이라는 비판이 가능할텐데,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와 정치의 전화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사민주의적’이라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한 나라의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에 대해서 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르게는 당-노조로 구조화되어 있는 운동내
질서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도 가능하다.) 가장 쉽게는 대중운동의
활성화가 아니라 자기 당의 성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고 지지를 선동하는
방식으로 그네들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우리의 입장이 사민주의적이라는 비판은 어떠한 지점인가 하는 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케인즈주의는 사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일
분파이다. 흔히 범하는 오류이지만, 케인즈주의가 시장의 자율성에 대한
통제와 정부의 개입을 주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수요 창출의 측면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었다.
#3. 대중운동의 올바른 목표설정
>>>투표라는 방법이 대중을 수동화시킨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니...
놀랍다.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이나 총선국면에 대한 분석/대응은
그러한 인식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또 다른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이 눈에 띄는데, “탄핵반대 운동의 성장없이
국민소환제 운동도 없다. 대중의 의식이 좌파들의 입맛대로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하지는 않는다” 는 부분이다. 대중들의 의식은 우리
입맛대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정작 내가 하고 싶던 말이다. 일단
탄핵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조직/참가하고 나서 나중에 국민소환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어떤 특정한 시기
정세에 맞는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선후의 목표를 따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세와 대중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도출하는 문제이다. 일단은 이러한 것을 하고, 그에 개입하고 나서
이러한 것을 하자는 단계론적 발상은 대중운동을 해가는 데 지양해야 할
바이다. 대중들은 좌파의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기에 시기별
전략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올곧은 입장과 계획을 현실의
운동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운동의 가장 올바른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진정한 대중운동의 활성화와 대중의 급진화를 위해
>>> 앞서 투표를 대중을 수동화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에 대해 사고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근거에서인가?
총선이란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진영에서
특정한 분파가 세력화하기 좋은, ‘국면’일 뿐이다. 대중투쟁이 중요하고
대중들의 직접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투표가 대중을 수동화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총선tac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우리도 총선이라는 국면에서 펼쳐낼 대중운동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총선이라는 국면을 무조건 무시하면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특정세력을 지지하거나 선거운동을 하는 방식 ―흔히 ‘총선에 대해서
개입한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대중들의
직접행동을 강조하고 대중을 급진화해야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급진화의 계획은 단순히 대중들이 있는 그 곳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며 개입의 계획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대중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동떨어져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다양한 인식과
정념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 대중이 ‘탄핵반대’를
외친다고 해서 그 구호를 함께 외치는 것이 아니라, ‘탄핵 반대’라는
상징을 어떻게 전화해내고 급진화시켜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개입의 계획없이 다만 대중을 긍정하고 탄핵반대를 함께 외쳐야
한다는 주장은 ‘운동 ’의 의미를 상실케 한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대중들의 삶 속에 다양하게 착종되어있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정념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전변시켜내고 바꾸어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에서의 불복종운동은 단지 노무현을 탄핵으로부터 구해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 고삐풀린 국회를 국민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토론하고 요구해야 하며, 그러한 민주주의 확장에 대한 고민
속에 국민발의제와 소환제가 놓여있다. 탄핵반대라는 구호를 함께 외치는
것으로 노무현을 손아귀에 둘 수 있으리라 보는가? 이 국면 속에서 이득을
보는 자는 노무현과 열우당이며, 이들은 결국 새로운 정당성과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고, 이로써 남은 임기동안 신자유주의를 강제할
강력한 지반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착각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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