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무효, 민주수호'(수호해야할 민주주의)라는 구호가 광화문과 기타 지역에서 촛불시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진보야당'론이 나왔다. 완벽한 시간 동조! 이는 이제 하나의 역사적 순환이 진정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7년 두 투쟁의 결론—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객관적인 원인들의 필연적인 연쇄가 가져온 결론. 그 앞에서 우리는 슬퍼할 이유도, 기뻐할 이유도 없다.
진보야당은 필요하다. 나는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민노당이 많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아직도 '총선 보이콧'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패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또 다른 좌파 정당을 창건하자고 제안한 것을 봤다. 하지만 그것이라면 사회당이 있다. 사회당은 이미 좌파 정당이 아닌 다른 것이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는 좌파들이 또 다른 정당을 만드는 문제로 이 문제를 볼 것을 가장 경계한다. 사회당의 위기를 착취하지 말라. 사회당의 위기를 분석하지 않고, 또 좌파적 대중조직들의 위기(산산히 부서진 민중연대여!)를 분석하지 않고, 현재 눈에 보이는 주어진 세력들을 단순히 (재)통합시킴으로써 이 위기를 '봉합'하려는 그 모든 시도에 나는 반대한다.
사회당 혹은 다른 조직들 또한 하나의 개별체인 한에서, 그것의 개별적 역량이라는 문제가 있을테지만, 역량이란 언제나 외부 사물들, 상황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상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역량은 잠재성potentiality을 갖는다. 이는 권력에 대해 구별정립적인 소위 '활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발리바르가 스피노자를 따라 말했듯 모든 사물들의 관계 속에 편재하는 동일한 하나의 '힘'(나는 이를 신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나는 '신 즉 자연'은 또한'신 즉 힘'이라고 생각한다)에 있어서 능동과 수동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힘의 상대성 및 비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의 전체적인 (재)형상화라는 문제. 즉 사회당의 위기의 원인을 사회당 내부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말자. 사회당의 본질 안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것도 존재치 않는다. 문제는 외부 사물들, 상황 전체와 그것이 갖는 관계로서 실존의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그 긍정성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외부 사물들(이는 복수이며 심지어 무한히 복수이다)과의 마주침의 그 오래된 방식, 그것의 문제, 그것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새로운 마주침의 방식을 '발명'함으로써 스스로를 능동화하기 위한 노력(코나투스!)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천천히 죽어갈 수 있을 뿐이다.... 국민발의권과 국민소환권 쟁취 투쟁이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 하의 '반-정치'라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다른 편에서 그것은 바로 그러한 '마주침'의 새로운 방식, 즉 좌파가 대중들과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명'하려는 노력이다. 합법적 공간에의 개입을 의회로 부당전제치 않고 더 많은 직접 개입의 경로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좌파 운동을 본질적으로 한계짓고 압박해 들어오는 부르주아 정치의 기계장치들과 맞서기 위해서 말이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자. 이번 탄핵정국에서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민노당의 야당화 혹은 개량화라는 문제'(따라서 정당정치에 대한 대안을 찾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진실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87년의 두 투쟁(6월과 7.8.9월)이 결국은 하나였다는 것, 즉 평행하는 두 '속성'이었다는 점이다. 이 평행하는 두 속성 혹은 두 영역(정치와 경제)이 어떤 동일한 질서를 '표현'하고 있는가를 인식해야 한다. 한 쪽에서의 불충분함이 어떻게 다른 쪽에서 동일한 불충분함으로 나타났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6월이 어떻게 7.8.9월을 압박해 들어왔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그 '합리적 핵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장치의 시민사회 내의 편재성'에 대한 인식, 즉 국가는 시민사회 위에 서있지 않다는 인식('토대/상부구조' 은유의 포기)으로 말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아주 오래전에 썼던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이는 종종 우리가 그렇게 여겨왔듯,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자체로 '정치' 투쟁이라는 것을 재긍정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내가 보기에 알튀세르는 이를 끝까지 철저하게 밀고나가진 못했던 것 같다). 또 반대로 '정당'운동이야말로 '정치' 투쟁이라는 그 자체로 부르주아적인 사고를 지속하고 강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계급투쟁이란 착취의 제도들(국가장치들)을 쟁점으로 한 끝없는 투쟁'이라고 규정해야 한다(나는 고백컨데 계급투쟁의 '종말'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며,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을 신학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써넣자: '그런데 모든 정치 투쟁은 그 자체 제도들 속에서 펼쳐지는 제도들에 대한 투쟁일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모든 계급투쟁은 '착취의 근절'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착취는 그것을 조직하는 그 모든 제도들의 총괄적 효과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착취'라는 '관념'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부조리한 결론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심지어 '계급투쟁이 제도들(국가장치들)을 관통한다'는 말조차 거부한다. 계급투쟁은 제도들을 관통하지 않고 언제나 제도들 속에서만 벌어진다. 계급투쟁은 제도들 바깥의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장소를 찾을 수 없으며, 그 형이상학적 실체를 갖지 않는다(스피노자에게 있어 실체란 역설적으로 그것의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취해진 거리의 공백일 따름이다).
이러한 인식이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가? 이제 그것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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