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는 모르나
앞부분의 탄핵정국에 대한 비판은
일반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탄핵반대 비판 논리를 정교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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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탄핵정국에서 실종되고 있는 것들
2004-03-22 오후 6:42:31-프레시안
김민웅/재외언론인
탄핵정국의 폭풍 속에서 뼈아픈 곡(哭)소리가 들린다. 알다시피 그 진원지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그리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내다보았던 자업자득이다. 부메랑도 이런 부메랑이 있으랴. 아무리 법리와 정치적 대의를 외쳐본다 한들, “대통령의 잘못도 분명 있으나 그런 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과하다”고 판단한 국민적 육성에 귀를 막은 정당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다.
탄핵정국의 현재 상황은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논란은 어디론가 실종되었고 여당인 열린 우리당을 향한 동반 부패 관련 책임규명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치적 면죄부가 알게 모르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깊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민주투쟁의 성과가 노무현 정권의 아무런 노선 변화도 없는 채 이렇게 정파적으로 헌납되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질 경우, 우리는 지난 1년간 산적해온 문제의 지루한 되풀이와 불안한 연장을 보게 될 것이다.
탄핵정국에서 실종되고 있는 것들
더더군다나 탄핵에 의한 직무 정지 기간, 영국 수상을 지냈던 대처에 대한 책을 손에 들고 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머리에는 그녀처럼 강화된 권력으로 대자본의 이해를 위해 민중들의 생존권에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어온 신자유주의의 위세를 더욱 심화시킬 복귀 이후의 구상이 전개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보다 세련된 모습의 파시즘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구태의연한 냉전수구세력의 저항만 살 뿐인 무모하고 거친 지배방식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탄핵을 추진한 세력의 중심에 냉전수구세력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정치적 축출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점에 이견을 달 까닭이 없다. 그러나 “탄핵반대가 곧 민주화”라는 식의 매우 일방적인 단순도식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에 대한 첨예한 비판은 국민적 거부감의 대상인 탄핵 찬성의 논리로 인식되기 쉽게 되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정작 구체적으로, 명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든 얻어야 할 바에 대한 논의는 발언권을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제아무리 선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해도 구체적인 논증과 합리적 논의보다는 매도에 의한 여론조성을 취하는 사회는 언제든 억울한 희생자들을 만들어 낸다. 프랑스 혁명이 민중들의 뜨거운 열기와 환호성 속에서 역설적으로 공포정치의 암울한 시기를 겪게 되는 역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오늘날 뛰어난 문명사가이자 종교 인문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그것을 “희생자에 대한 집단적 살해”(창세로부터 은폐되어온 일들/Things Hidd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1978)라고 부른다.
그 사회의 모순과 위기의 모든 원인을 하나로 단순화시켜 그 대상에 집중적인 린치를 가하는 것이다. 대중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정작의 원인을 만들어 낸 하나가 아닌 다수의 관련 책임자들은 이 과정에서 모습을 감추며 지목된 대상의 무덤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상황은 종료된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바는, 이렇게 상황이 끝나면 사태의 보다 복잡한 원인과 사연, 그리고 과정에 대한 심화된 인식이 어려워진다는 점에 있다.
모순과 위기의 원인을 단순화시키는 위험, 그리고 집단적 희생제의 문제
그리고 문제의 해결은 무덤에 묻힌 죽은 자에게 덮어씌우는 식이 되고 만다. 지배자는 민중에 의한 지배를 내세우나 정작은 민중의 어리석음을 속으로 비웃으며 자신의 모든 과오를 무덤 뒤에 배치하여 민중들의 눈에서 사라지게 한다. 무언가 격변은 있었으나 지배체제의 근본은 바뀌지 않고 지배자의 교체와 지배방식의 변화만 있을 따름이 된다. 민중은 결국 기만당하고 그들의 권리는 유린되는 것이다.
지라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탄핵 반대와 찬성이라는 도식 이상의 기준과 논의를 진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 대한 치밀한 복기(復記)와 도매금으로 넘어가서는 아니 될 것들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극복의 대상과 계승의 대상에 대한 혼돈”을 가져올 수 있어서이다. 그 결과는 모순의 심화이다.
한나라당의 정치적 퇴패는 아쉬울 것이 없다. 그러나 “민주당의 눈물”은 사뭇 가슴을 아리게 한다. 냉전수구 및 부패세력으로 낙인찍힌 한나라당과 탄핵가결의 과정에서 결탁함으로써 민주개혁진영을 이탈 내지 배신했다는 오명 아래 처참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지만, 민주당이 과연 이 시대의 역사적 발전을 가로막는 냉전수구세력이었던가 라는 질문 앞에서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눈물이 가슴 아린 것은...
잘못이 있다면, 노무현 정권의 적지 않은 정치적 파행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국민적 공론의 장에 넘겨 국민들 스스로가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치적 전망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극복해가는 방책을 세우지 못하고, 정략적 수준에서 대응하는 오류에 빠졌다는 점일 것이다. 지도부의 돌이키기 어려운 오판과 실책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국민과 함께 가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생각을 우습게 여긴 채 정파적 이해를 앞세운 오만의 결과이다. 자유주의적 보수정치의 틀 속에 있기는 하나 평화개혁세력의 본산(本山)이라는 자신의 전통적 정체성을 상실해버린 채, 정략적 대치선을 만들어 승리하는 일에 몰두해버린 지점에서 직면하고 있는 비극이다.
개별 정치인의 차이가 있긴 하나 전체적으로 볼 때 민주당이 개혁에 수구적으로 저항해왔다거나 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의 봉건적 정치에 매몰되어 왔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집권당의 위치에서 남북간 평화정책의 추진에 힘을 실어왔고 오랜 지역 차별에 대한 교정의 정치를 위해 노력해온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라크 침략 전쟁 동조 파병에 대한 반대를 권고당론을 결정한 바 있듯이 (그 동기에 있어서 노무현 정권과의 대치선을 위한 정략성도 있었으나 이를 주동적으로 추진한 세력은 일관해서 반전평화 정책을 내세운 세력이었다) 파병 가결을 해버린 열린 우리당에 비해 민족적으로나 인류적 차원의 도도성에 있어서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다.
압축해서 이야기 해보자면, 민주당의 존재는 영남 패권주의적 기존질서에서 소외되었던 호남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시키는 균형자의 역할을 하는데 크게 이바지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적 동력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한계는 있으나 서민 친화적 경제정책의 집행과 파병반대에 이르는 반전평화의 정치적 보루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온 대목이 분명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자산을 가지고 하는 정치
따라서 민주당의 오늘날과 같은 비극적 쇠락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지켜왔던 이러한 정치적, 민족적 자산은 가볍게 저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의 경우 도리어 냉전수구세력의 분파인 한나라당 출신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이며 열린 우리당의 경우 주체적인 남북평화정책의 추진보다는 종미적(從美的) 자세를 지닌 세력이 지배적 위치에 있고 파병 가결에서 보였듯이 반전평화의지가 민주당에 비해 한결 떨어짐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당은 기실, 이런 자신의 자산을 보다 강력하게 내세워 오늘의 현실을 돌파하는 정책의 기조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정국대처 능력을 보였어야 했으며, 탄핵이 아니라 파병 반대를 한 당 답게 그 문제를 가지고 헌법정신을 기준으로 하야논쟁을 주도하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무능과 혼선을 국민적 논쟁으로 이끌었다면 상황은 아마도 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노무현 정권의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과연 이대로 4년을 더 맡길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국민소환권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면, 야당으로서의 역할도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전통도 모두의 자산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탄핵 하나만을 가지고 정국 전체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아니라, 보다 많은 논제를 가지고 우리 정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단견으로 스스로를 망치고 말았다. 또한 민주당에 대한 기대를 가진 무수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갈 곳을 잃게 만들었다. 이것은 모든 정당이 깊이 응시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산의 가치를 중심으로 국민적 호소력을 갖는 정당이 될 때 성공하는 것이다.
돌이키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을까? 내분과 노선의 혼란으로 몰락의 지경에 처한 민주당의 현실은 보수정치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하지 못한 정치세력의 비통한 자리를 드러내고 있다.
증오와 원한의 정치, 그리고 강준만의 슬픔
그러나 이렇게 비판의 칼을 그대로 날카롭게 세우기에는 민주당이 겪은 통한의 과정도 함께 고려해주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민주당만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대목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논객이자 김대중, 노무현 2대에 걸쳐 이 사회의 기득권이 능멸하고 편견으로 대한 인물들을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정통성을 갖도록 만드는 일에 진력을 다해온 강준만 교수는 한국일보에 그가 연재해온 칼럼을 중단하면서 그의 아픈 마음을 토로한다.
그 글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편지 형식으로 그에 대한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깊은 애정을 담아 개혁을 명분으로 하여 어제의 동지들을 대상으로 칼을 꽂는 분열주의적 정치의 폐해와 그로 인한 고통을 쏟아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님. 외람됩니다만 저는 몇 개월 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모든 일이 대통령님께서 원하고 기대하시는 대로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님께 위로보다는 고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분간 한가한 시간을 ‘학습’과 재충전의 기회로 삼으시면서 제 고언을 음미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3, 4개월 전 민주당 분당과 관련하여 열린 우리당을 강하게 비판했었습니다. 대통령님도 비판했지요. 그 후 저는 정치에 관한 글쓰기를 중단했습니다.....지금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 대화 불능의 상태입니다. 도무지 저 같은 중간파가 설 땅이 없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님을 지지했던 사람들마저 양극으로 갈려 이 모양인데 대통령님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떠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극단적 분열주의의 문제
저는 이런 극단적 분열주의에 대해 과거 대통령님을 열렬히 지지하는 책들을 썼던 사람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도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저는 탄핵안 가결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분노하고 개탄하는 사람입니다만, 열린 우리당의 비판 내용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님과 열린우리당이 추구하는 숭고한 목적을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동의할 수 없었던 건 그 방법론이었습니다.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저주를 이용해 과거의 민주화 동지들에 대한 사실상의 ‘인격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신당 창당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한다고 해서 민주당에 남은 사람들만 어떻게 하루아침에 ‘반(反) 개혁, 친(親) 부패, 지역주의 기생세력’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느꼈을 인간적 배신감과 모멸감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감옥 가서 고생하는 건 나중에 명예나 되지요. 그런 식으로 모멸을 당하는 건 감옥에 몇 년간 처박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일 겁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국민적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들도 자식들에게 지키고 싶은 명예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수십년간 저질러진 ‘호남 소외’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실 대통령님께서 영호남 지역주의를 양비론으로 대하는 것도 전혀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선 그런 것들은 개혁과 미래를 위해선 ‘작은 문제’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는 바로 그런 생각을 재고해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증오와 원한을 만들지 마십시오. 더디 가더라도 화해와 타협을 해가면서 우리는 옳은 길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열렬한 지지자들에게도 사랑과 관용을 호소해 주십시오. 대통령님이 모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될 자질과 역량이 충분한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탄핵정국에 묻혀서는 아니 될 것들
노무현 대통령이 진정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될 자질과 역량이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그와 필자 사이에는 매우 심각한 이견이 있으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이 “국민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저주를 이용해 과거의 민주화 동지들에 대한 사실상의 ‘인격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대목은 그저 지나칠 수 없다. 불필요했던 정치적 적대감의 심화로 인한 증오와 원한을 유발한 책임에 대하여 그는 짐짓 예의를 갖추면서도 준엄하게 묻고 있다.
이 물음의 밑바닥에는 대통령 노무현이 민주화 투쟁에 관여하기 훨씬 이전부터 뼈저리게 겪어왔던 호남인들의 지역적 소외감과 정치적 무력감에 대한 연민과 아픔이 배어 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오늘의 탄핵정국의 소용돌이에서 그대로 묻힐 것들이 결코 아니다.
되풀이 강조하건데 지금의 정국은 진보적 대안이 아니고서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 해결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진보적 대안도 가령 민주당이 지난 세월 껴안아왔던 사안들을 또한 같이 껴안아가지 않고서는 아니 될 것이다. 민주당의 정치적 쇠락이 곧 민주당이 감당해왔던 역할의 총체적 부정이 이루어져도 된다는 것을 의미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 대단한 경력을 훈장으로 달고 있다 해도 시대적응에 실패한 정치세력의 생존은 불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현실에서 아무리 소수가 된다 해도 지켜야 할 자신의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국민 앞에 나선다면, 역사는 용서와 심판을 구별하여 선고를 내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으로 나설 것인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지 결단하는 것만이 남았다. 수구세력과 함께 동반 소멸되어야 하는 정당인지 아니면, 준열한 자기비판과 함께 되살아나 이 냉혹한 집단적 비난의 소나기 속에서 자기를 되찾을 것인지 모두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부디 강준만 교수의 슬픔과 그의 당분간의 절필이 관련 당사자인 노무현 대통령, 열린 우리당, 그리고 민주당 모두에게 귀한 약이 되기를 바란다. 한때 이 시대의 평화개혁 세력의 본산을 자처했던 민주당 애가(哀歌)를 부르는 오늘, 서울은 봄볕으로 겨울과의 결별이 완연하다고 소식 들었다. 봄이 온다고 누구에게나 모두 봄인 것은 아니겠으나, 탈각(脫殼)하는 자에게 세월은 꼭 그리 가혹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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